강론 말씀 (가나다순)/신부님들 말씀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 강길웅 신부님

김레지나 2018. 7. 20. 21:18

  평화방송의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코너에서 강길웅 신부님의 영성강좌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2부>를 보았습니다. 강의 1부와 2부 앞부분은 못 보았구요. 2부 중간부분부터 받아적었습니다.^^

 

 

(전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라는 말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시의 전문 소개)

삶이 우리를 속인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 그 안에 하느님의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깨달으면 속은 것이 다행이고 기쁘게 생각됩니다. ~~~~~

 

 

성철 스님의 말씀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깨닫기 전에는 은총이 은총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웃는 것만 은총이고 배부르게 먹는 것만 은총인 줄 아는데 은총은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성철 스님의 법어를 풀이해 보자면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살고 죽는 게 둘이 아니다. 보이는 것은 관음이요 보이는 나무와 돌멩이가 부처요. 물소리, 새소리가 천상의 음악이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다 진리를 말하니 아아, 여기 모인 청중은 알아듣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깨달으면 모든 것이 진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깨달으면 모든 게 부처가 되고 진리가 됩니다. 깨닫기 전에는 세상은 아직 세상이 아니고 은총은 아직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 은총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습니다.

 

 

김소월의 시에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라는 시가 있어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았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은 시인의 가슴에서 그때까지 잠자고 있었어요. 달은 달이 아니었어요. 달이 뜨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잠자던 달이 깨어났는데, 달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달이 되는 거여요. 어떻게 갑자기 달이 달이 되었지요? 여러분은 연애 감정 같은 것도 없었지요?(웃음) 그냥 시집 가라니까 시집 온 거고..... 성당 가라니까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다니고... 왜 갑자기 달이 달이 되느냐? 예쁜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을 알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고 있던 세상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랑을 깨달으면 잠자던 세상이 눈을 뜨는데, 깨달으면 부처님이 서방 정토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나무나 돌멩이 안에도 계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고 달이 눈에 들어오듯 깨달아야 신앙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깨달으면 은총 아닌 것이 없고 축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절에 다니고 삼천 배를 해도 아무 것도 아니다 깨닫는 것은 훨씬 높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날마다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 하고 병원 봉사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잘 들으셔야 됩니다. 똑같은 봉사라고 해도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는 다릅니다. 똑같은 봉사에요. 똑같이 찬양도 하고 음식도 만들고 차량봉사도 하는데,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깨닫지 못한 봉사는 서로 간에 시기 질투가 많고 자기 뜻대로 안 따라오면 왕따 시켜 버리고 그래서 공동체가 일은 많이 하는데 시끄럽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깨달은 봉사는 다릅니다. 일 하다보면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누가 때려도 아프다고 안 합니다 찔러도 섭섭하다 안 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바라보는 은총이 너무 크니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하는 겁니다. 알아 듣겠습니까?

사람들은 그저 자기 뜻이 이루어지면 알렐루야 아멘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하는데, 물론 그것도 은혜의 한 일종이지만, 더 수준 높은 은혜, 더 차원 높은 은혜는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갑돌이가 갑순이를 사랑한다고 해보세요. 정말 사랑하면 갑돌이는 감순이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돈도 시간도 아깝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갑순이를 위해 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갑순이를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요? 돈이 아까워서 있어도 없다고 합니다. 시간이 있는데도 바쁘다고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겉은 사랑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갑순이를 이용해 먹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요술 방망이처럼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요술 방망이나 머슴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기도도 안하고 성당에도 안 나옵니다. 여러분이 오늘 성가도 부르고 강론도 듣고 미사도 봉헌했습니다. 그럼 뭘 하자고 이렇게 수고하십니까? 목적이 뭐고 하느님께 뭘 바라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하느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정말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눈물을 흘리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사탄의 농간에 우리가 흔들림이 없다는 것, 우리 믿음과 신뢰가 변함이 없다는 것을 하느님이 바라보시고 여러분을 믿으십니다.

 

 

아까 깨닫기 위해서는 뭐가 좋은 스승이라고 했지요? 고통과 슬픔은 좋은 스승이 됩니다. 고통,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불가에서도 그럽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을 많이 하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참본성을 바라보기 위한 수행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에 대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교외별전’- 깨달음은 경전 밖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경전으로는 알 수가 없다. 경전을 통달해도 안 된다. *‘불립문자’-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없고 스승이 가르쳐줄 수도 없다. *‘직지 인심’ - 사람의 마음속을 관통해야만 한다. 이건 고정관념 일반상식 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물구나무 서기를 아무리 오래 해도 못 들어갑니다. *‘견성성불’- 들어가서 자신의 참본성을 바라보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깊이 들어가서 은총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하느님을 천상에서 대면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어떻게 깨우침을 주는고 하니, 스승이 봤을 때 제자가 많이 익어 내공이 많이 쌓였다 싶으면 몇 가지 방법을 씁니다. 예를 들면 ‘방(梆)’을 씁니다.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갈겨요. 제자가 손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을 때 깨닫게 됩니다. 깨달은 제자는 다리가 부러져도 기쁩니다. 섭섭하지 않습니다. ‘할’ - 갑자기 물어봅니다. 귀에 대고 너는 어디서 왔느냐.하고 귀청이 나가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놀라는 순간에 갑자기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아주 기상천외한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그럼 익은 과일은 떨어집니다. 일반의 상식을 건너뛰어야 되는데, 우리에게 불청객이 있어야 합니다. 불청객은 어제 올지 모르지요. 시도 때도 없이 옵니다. 고통 슬픔 실패, 상처 등과 같은 불청객들이야말로 내 안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해줍니다. 내 안에 깊이 들어가게 인도해줍니다. 참 십자가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 다들 싫지요? 우리가 원하지 않은 불청객 안에는 뭔가 하느님의 은총이 있는 거예요.

 

 

오래 전에 제가 김포 공항에서 과전의 모 수녀원으로 갈 때에 어떤 세 자매가 저를 픽업해주겠다고 공항에 나왔어요. 그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후에도 없었어요. 그때가 2월이었는데 차타고 가는데 진눈깨비가 내려요. 길이 미끄럽게 되자 차량들이 전진을 못하고 정체가 심하게 됩니다. 보통은 택시로 한 시간 정도면 갔는데 그날은 세 시간이 넘었는데도 목적지까지 못하는 거여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그런데 2월에 그 시간이면 집에서 저녁 준비를 해야 됩니다. 제가 미안해서 긴장을 하고 있지요.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다가 불쑥 자매들 생애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뭡니까? 하고 물었어요. 세 분이 다 긴장을 하면서 얼른 대답을 못해요. 처음 들어본 질문이라 당황한 것 같았어요. 뜸을 들이다가 운전하는 자매에게 물었더니, 남편을 잘 만난 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경제력도 있고 가정적이라 남편과 살면서 속상한 일이 없었어요.라고 해요. 참 좋은 남편이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운전석 뒤의 자매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아들을 잘 둔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복사도 잘했고 고3일 때도 수능공부하면서도 주일 미사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그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어머니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요. 참 좋은 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뒤에 있는 자매에게 물었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저는요.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이 이 세상에서 받은 최고의 은혜입니다.”라고 해요.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하는데 갑자기 나머지 세 사람이 꽁꽁 얼어붙었어요. 왜 이렇게 큰 사람 말을 여직 못 들어봤는가. 마지막 자매는 제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가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자매는 힘들어도 하느님 때문에 참을 수 있었어요. 남편이 병으로 누워있고 자녀들은 공부도 못하고 말도 안 들어요. 그래도 하느님 때문에 일하면서 가정을 살리고 있습니다. 남편 복도 아들복도 없는 여자가 하느님 복은 혼자 독점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사랑을 깨달으면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에게 형님이 한 분이 있는데 형님의 말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건뜻하면 신부님들 욕이고 건뜻하면 저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하는데, ‘내가 몇 살인데 이 나이에 그런 말을 듣지?’하고 속상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오면 존경 받는 신부인데 집에만 가면 ‘새끼’가 됩니다. 하루는 원주에 있는 치악산에 강론 갔다가 산에 가려니까 자매들이 같이 가자고 따라온답니다. 산에 올라가면서 성경구절 하나씩 묵상하고 비로봉에 올라가서 나누자고 했습니다. 그때 문득 성경말씀 하나가 저를 치는 거여요. 고린토 1서 12장. 바로오에게는 고통이 있었잖아요. 자만하지 않도록... 그 가시가 무엇이다라고 이런저런 설이 있는데, 저는 그때 그 가시가 뭔지 알았어요. 아 바로오 사도도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말로 상처를 받았구나. 그 생각을 하니까 형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집니다

제가 당시에 방송으로 좀 떴네요..... 테잎도 나오고... 그러니 형님 말씀이 잘난 체하지 마라 교만하지 마라 겸손해야 한다고 들리는 거여요. 그러니까 형님이 이 새끼하면 잼있습니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대꾸했더니 그후로는 형님이 ‘이 새끼’ 소리를 안 해요.

 

 

아픔 속에는 그분이 숨겨놓은 어떤 선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찾아야 되고 찾으면 아파도 아프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37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아멘.

 

 

희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