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 기도하여라.” - 신앙 유혹 탈출기
유혹이 찾아올 때 / 김유정 신부님
고해성사를 받고 나서 결심한다. '그래, 이젠 여간해선 화내지 말고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을 무너뜨리는 일이 어김없이 일어난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기도 하고, 하느님께 맡겨드렸다고 생각했던 일이 걱정거리가 되어 또다시 떠오르고,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유혹이다! 그것이 유혹임을 즉시 알아차리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다. '나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나?' 원망을 하다가 반성한다. '주님, 늘 같은 죄에 걸려 넘어지는 저를 용서하소서.'
많은 이들에게 반복되는 일상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내가 쥐고 있으려 했다. 하느님 안에서 올바로 살아가는 일은 내 결심으로가 아니라, 매 순간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넘겨드림으로써 이루어진다. '화내지 말자'는 다짐보다, 지금 함께 계신 하느님께로 주의를 향하려는 노력이 필요했고, '감사하며 살아야지'라는 결심보다, 실제로 하느님께 감사드림이 필요했다. 둘째, 나를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마음속 움직임의 정체가 유혹임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우리 삶은 두 가지 움직임 사이에 자리한다.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움직임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움직임이다. 앞의 것은 성령의 작용이고, 뒤의 것은 유혹이다. 언제나 성령의 힘이 더 크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도록 강압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다.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창세 1,26)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고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으로 그 초대를 지속하신다. 거룩함과 완전함, 자비하심은 하느님의 속성인데,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하고 완전하며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귀결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닮을 수 있는가? 보이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음으로써이다. 이탈리아의 양성가인 아메데오 첸치니 신부는 "우리의 삶은 성부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성자 예수님을 양성해 가시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모든 사건과 상황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관하시는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써, 그 교육의 목표는 단 한 가지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성경의 첫머리에 각각 유혹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배우는 것은 ‘하느님을 닮는 삶’이라는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이 어떻게 유혹에 무릎 꿇는지를,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유혹을 물리치는지를 배우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 에덴 동산을 두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6-17)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시면서 단 하나의 금령(禁令)을 주셨다. 그러나 유혹은 하나뿐인 금령을 어기도록 부추겼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인간이 받은 소명은 ‘하느님을 닮는 것’인데, 유혹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하느님처럼 되라'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만 유보된 선과 악의 기준을 제멋대로 가져와 '네가 하느님이 되라'는 것으로, '하느님이 아니라 너 자신을 섬기라'는 유혹이다.
사람은 왜 유혹에 넘어갔을까?
첫째, 유혹의 말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다. 뱀이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고 말을 걸어오자 하와는 대답한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창세 3,2-3)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유혹의 소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뒤섞었다.
둘째, 시선을 유혹으로 돌렸다. 쳐다보니 과연 그 나무 열매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이고 탐스러웠던(창세 3,6)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되뇌는 말의 지배를 받고, 우리가 자주 바라보는 대상을 섬기게 된다. 하느님 말씀을 되뇌고 하느님을 바라볼 때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지만, 다른 말을 되뇌고 다른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 나를 화나게 하는 말, 나를 섭섭하게 한 말을 곱씹는다면, 그 말이 나를 다스리라고 허용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것더러 나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오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 위를 걸어갔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워져 물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시선을 예수님에게서 돌려 유혹과 시련으로 향하자, 그것에 빠져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선을 주님께로 향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눈앞에 무엇이 있든, 주님 말씀을 되뇔 때 시선을 그분께로 향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유혹을 물리치셨는지 보자(마태 4,1-11).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받았던 유혹을 몸소 체험하시는데, 악마는 성경 말씀을 교묘히 인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한다. 불평과 지상 음식에 대한 갈망의 유혹(‘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느님더러 꼭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해보시라면서 하느님을 시험해보는 유혹(‘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은 결국 하느님을 주심으로 모시지 말고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라는 유혹으로서, 첫 인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겪에 되는 유혹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하느님 말씀으로 대처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예수님께서는 하와보다 기억력이 좋으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외우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되뇌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살아 계신 말씀께서 유혹을 물리치도록 하신 것이다.
유혹은 예수님의 일생을 두고 계속해서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다시 물리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유혹을 겪는 것처럼 느끼지만, 모든 유혹은 두 가지 유혹의 변형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마르12,30-31)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다.
유혹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이것이 정상적인 교육과정의 일환임을 깨닫고 그것이 유혹임을 알아차린다.
둘째, 언제나 하느님 말씀을 되뇜으로써 그 말씀이 승리하시도록 해야지, 스스로 유혹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적극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유혹도 있지만,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삶에 안주하게 하려는 유혹도 크다는 것을 상기한다.
지금 내 삶의 방향은 하느님께로 향해 있는가, 나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가.
- 김유정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 생활성서 2018년 3월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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