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루카 9장 22-25절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
외국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다보면 다들 큰 호기심을 가지고 제게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저게 다 교회가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땅에는 정말 십자가가 많더군요. 여기 저기, 50미터 100미터도 못가서 나타나는 교회들, 그 교회의 꼭대기에는 다들 보란 듯이 십자가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恨)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점철된 ‘십자가의 민족’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십자가는 왜?’ ‘고통은 왜?’ 라는 질문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되풀이되어온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시편작가들도 고통의 연속인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 빠져나가듯이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 앞에 시편작가는 차라리 체념하고 수용하는 게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대답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 특히 원죄에 대한 경고이자 징벌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보약입니다.”
‘고통은 왜?’란 질문 앞에 지금까지 교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답안이었습니다.
물론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일취월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십자가에 대한 도에 넘치는 수동적, 소극적인 자세는 최선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라는 당부는 힘에 겨우니 체념하라는 말, 어쩔 수 없으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매일 와 닿는 고통과 악, 병고와 불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라. 그러나 퇴치할 수 있는 고통은 마땅히 퇴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갖은 고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십자가는 미리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각고의 노력을 다해 극복해야만 합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