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다시 산다는 것 - 부활성야를 준비하며
송용민 신부
부활(復活).
다시 산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지만, 살면서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삶은 그렇게 큰 축복이 아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내 생명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지.
부활절이 되면 우리는 부활의 의미에 대해 되묻곤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부활은 다시 산다는 것이니, 내가 죽어본 적이 없으면 다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죽어본 사람만이 다시 산다는 것의 기쁨을 알테니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린 죽어본 적이 없다. 죽을 뻔한 적은 있겠지만, 혹시 누군가 죽음의 세상을 다녀왔다고 체험수기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어 그 자체가 이미 생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니 설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그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임사체험을 했을 뿐이다. 생물학적으로 내 숨이 끊기는 현상이 발생했다가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명이 되돌아온 것일 뿐일테니 말이다.
요즘처럼 자연과학과 생명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전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밤을 축제로 맞이한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건은 불과 2천년 전 이스라엘의 작은 땅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국사범으로 처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의 사형장면을 보면서 한 사람의 희생을 보았을 수도 있고, 절망과 좌절을 맛봤을 수도 있다. 메시아라는 희망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한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신지 3일째에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알렸다. 시신이 안치되어 있어야할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에서 빈무덤 이야기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첫 번째 표징이었다. 제자들 조차도 그 빈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곧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마침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다락방에서 숨죽이며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발현하셨지만, 그분의 부활이 어떤 형태였는 지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믿을 뿐이다.
부활은 분명히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의 삶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완전한 죽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죄와 고통의 짐을 짊어진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었고, 그 구원의 역설적 신비에 자신을 맡긴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하느님께서는 들어높여 주신다.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산이와 죽은이 모두의 하느님이시고, 그분께 우리의 삶과 죽음도 맡겨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는 지 알 수는 없으나, 그분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믿음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다시 살기 위하여, 때로는 죽는 연습도 필요하다.
살면서 죽지 못해 살기도 하고, 살면서 사는 것 같지 못하게 사는 삶도 얼마나 많은가?
내가 정말로 살아 있음을 느끼려면 내가 죽을 수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는 체험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살아서 매 순간을 감사하며, 다시 생기를 얻고, 용기를 얻어 무엇인가 내게 생명을 주신 분께 돌려드릴 것들을 준비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분명히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절망이나 생의 어두움이 아니다. 죽음은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춰져 있던 모든 신앙의 신비가 밝혀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2천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다. 썩어 없어질 그런 육체로의 부활이 아니라, 불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 시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성을 체험하는 것, 곧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체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죽음 이후에 만나지 않고, 지금 -여기서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인 이유다.
최근 유대인 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은 '사피엔스'란 책에서 던져진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인류가 과연 지금의 진보와 혁명의 시기를 넘어 무엇을 추구하려 하는 지 묻는 것이다. 과연 인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종교적 상념을 넘어 이제 과학혁명을 통해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신이 되고 싶어하는 경지까지 요구한다면, 인류종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최근 인공지능이 인류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킬 가능성을 엿보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이유는, 과연 인류는 진정으로 행복한 가에 대한 질적인 물음 앞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인간이 어떤 형태로든 바벨탑을 쌓아 신과 같아지려는 유혹을 이제는 현실적인 욕망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시대의 징표 속에서 과연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지 되묻는 일이다. 어쩌면 죽음을 거부하는 신인류의 노력들이 죽음을 진지하게 맞이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의 교만의 바벨탑이 아닐지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신앙이란 허구를 가능하게 만드는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이라고 하지만, 진정 우리가 죽음을 넘어선 허구의 세상을 꿈 꾸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 지혜의 궁극적인 완성인 하느님과의 만남이란 놀라운 체험을 언어로 표현해내기에 여전히 궁색해지는 한계를 체험하는 것도 신앙의 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다. 내 삶에서 죽지 못하는 부분들을 죽일 수 있는 용기,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한계와 결핍, 그리고 진정 다시 살고 싶다는 깊은 갈망과 희망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움터져 나올 때 진정한 부활절은 우리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16. 3. 26.
2016년 부활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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