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부자가 되는 기준 -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김레지나 2016. 6. 11. 18:21

부자가 되는 기준


송용민 신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루카 16,19-31)는 사순시기에 단골 메뉴처럼 나오는 교훈적 비유 이야기에 속한다.

이야기의 구성은 아주 분명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전래 동화에서 단골처럼 나오는 권선징악의 큰 들을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 가령 이 세상에서 라자로처럼 불쌍하게 산 사람들은 죽어서도 그렇게 불쌍해질까? 자기만의 배를 불리며 산 부자들, 그래서 늘 빈자들의 원망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죽어서도 그런 부유함을 보장 받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이 중요한 물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과연 부자가 되는 기준은 무엇이고, 라자로의 운명은 누구 탓일까?


이런 물음 앞에서 한 번쯤은 되묻고 싶어진다. 나는 부자일까? 라자로일까? 만일 이 복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라자로에 비유한다면 그에게 이 복음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다. 현실에서의 불행과 고통을 저승에서는 하느님께 보상 받을 거란 믿음은 모든 종교가 지닌 공통된 인간의 희망에 속한 것이 아니던가. 물론 복음서는 라자로가 왜 그렇게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었는 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최소한 그 복음을 읽던 시대에 라자로로 대표되는 인물들이 겪는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의, 약자들에 대한 아픔들이 전제되어 있을테니 말이다. 최소한 라자로 스스로가 게으르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가난한 처지가 되었는지, 요즘 우리 사회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도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가진 자의 세상 속에 던져져 버린 사회적 약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라자로는 우리 주변에서 가난 때문에 인간의 최소한의 삶의 질을 잃어버린, 그래서 굶주리고, 부자의 집 문간에서 버려지느 음식이라도 먹어보려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인간 군상을 표상한다.


그런 라자로와는 정 반대로 부자의 삶은 아주 단순하다. 그냥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그가 선행을 했는 지 안했는지, 그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그 집 문간에 라자로가 굶어죽게 만들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 나온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부자는 나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지옥불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서 부를 누리다가 죽은 사람은 결코 저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단순한 도식논리가 통할지도 모른다. 마치 모든 부자는 지옥을 간다는 논리로 해석하면, 우리 나라에 제법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당장 이 복음에 쓴 표정을 짓겠고, 별로 교회에 나오고 싶지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부유하던, 가난하던,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가 찾는 삶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곧 죽음을 넘어 영원을 만나는 저승, 하느님의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 지에 따라 저 세상에서 영원한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기준도 명확하다. 세상에서 가난과 고통에 찌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저 세상의 하느님을 희망하고 갈망하며, 탄원하고 살았으니, 그가 하느님을 마주하고, 그분 품에 머물 것이란 건 복음의 논리로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부자가 세상에서 자기 부에 만족하고 살았다는 것은 별로 하느님의 세상, 그분과의 만남에 대한 갈망이나, 희망 없이 살았다는 말이다. 단순하지만 아주 명료한 것이다. 그러니 부자가 하느님을 갈망한 적이 없으니,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마주할 가능성은 없어질테니 말이다.


복음의 이야기는 교훈적이지만, 언제나 지금의 삶에 대한 훈계를 담고 있다. 부유함이 우리 삶의 목표라면, 그 부유함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물론 나의 능력과 노력, 좋은 기회로 세상에서 충분한 부를 누리고 살아가는 복된 삶도 많다. 그렇지만 따지고보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가진 부가 결코 나만의 노력으로 쌓아진 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부자들의 착각이고 오만이다. 가난한 사람은 능력이 없고, 노력도 없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지 못했다는 아주 단순한 천민 자본주의적 논리야말로 우리 시대 가장 큰 해악이다. 모두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돌아갈 인생인데, 처음부터 세속적 부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사람과,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마치 적자생존적 방식으로 풀어간다면 그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그리스도교적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다시 묻자. 나는 과연 부자인가? 라자로인가?

만일 내가 라자로라면 내 삶의 희망이 하느님께 있음을 의지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나눔을 통해 그들이 지닌 인간의 생존권과 행복 추구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일 것이고,

만일 내가 부자라고 느껴진다면, 부자로서 내가 이 세상에서 살면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부유함을 얻기 위해서 나눔과 애덕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많은 재화를 쌓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공통된 욕망이 과연 그리스도교의 박애와 친교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어떤 도전이 될 지 다시 물어야 할 때인듯 싶다.


2016. 2. 25.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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