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인간의 지혜(sapiens), 무엇을 지향하는가?

김레지나 2016. 6. 11. 18:23

인간의 지혜(sapiens), 무엇을 지향하는가?


송용민 신부



봄을 맞이하는 시간들이 있다. 봄꽃들도 자기 시간을 알고 하나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처음에는 산수화, 매화, 목련, 그리고 개나리와 벚꽃, 그리고 봄의 마지막은 언제난 철쭉으로 덮힌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순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렇게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 그대로이다. 존재하는 것들이 자기들의 질서에 따라서 그렇게 순응하듯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인간만이 이런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있는 지혜(sapiens)를 지녔다. 물론 그 지혜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 종이 지닌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자연을 이용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일종의 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 진화의 한 복판에 우리는 서 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이다. 인류의 모든 종들을 지배할 수있는 지혜를 가진 인간, 성경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을 닮은,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을 나눠받은(分有) 지성적 존재인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동물적 존재로가 아니라, 신(神)을 상상하고, 희망하고, 신념할 수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 인간 삶의 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첨단 과학이 지배하고, 미세 과학의 영역이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세상, 우주의 광활함을 더 멀리 날라가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싶어하는 세상. 인류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인간 지성이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생명의 영역까지 관찰하고, 조정하고, 지배하고 싶어한다.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은 이제 자신이 스스로 신의 영역에 다다르고 싶어하든지,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인류의 역사에는 언제나 신화(神化)의 꿈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거스르고 싶은 욕망. 죽음을 넘어 영생을, 고통을 넘어 치유를, 분열과 혼란을 넘어 평화를 찾는 인류의 노력은 완전함과 절대성, 최고의 선과 기쁨으로 표현되는 천국을 지향하는 신적인 세상에 대한 동경과도 같은 것을 찾아왔다. 과연 인간은 이 인류의 역사에서 무엇을 찾고 싶은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결국에는 병들고 썩어 없어질 육체를 영원하게 만들 것인가? 마음의 고통을 조절할 수 있는 인위적인 요소들을 만들어 내 심리적 상태까지 조정하는 영역에 도전할 것인가? 결국에는 신이란 우리들이 되고자 하는 희망의 자기 투사에 불과하다는 포이에르바흐의 선언에 결국 굴복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 신앙은 이런 인간의 환상에 어떤 답을 줘야할까?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님을 어떻게 세상에 드러내고, 그 희망을 살아가야 할까? 아마도 신학은 이런 물음에 답을 찾는 여정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의 이런 여정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 앞에서 언젠가는 답을 찾게 될 것이란 점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영원을 알려주는 표지라고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없이 다가오는 표징의 언어와 생각들을 마음에 곱씹는 시간 속에 잠시나마 영원의 흔적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신앙하는 이유이자, 믿음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16. 5. 20.



요즘 제 생각을 끌어가고 있는 책 한 권입니다.

유대인 학자, 유달 하라리의 사피엔스란 책...

인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문제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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