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기억과 망각의 힘 - 2016년 8월 12일(금) 강론

김레지나 2016. 9. 24. 08:51

기억과 망각의 힘 - 2016년 8월 12일(금) 강론



내가 사제품을 받고 얼마 안 되서 어머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아침일찍 어머님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 적이 있다. 그리고 곧바로 어머님은 침대 곁에 걸터 앉으시더니 밑도 끝도 없이 당신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셨는지부터, 어린 시절 가난한 삶 속에 일찍 어머니를 잃은 이야기,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너무 공부가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기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학교 안보내고 종일 농사일만 시킨 이야기, 그래서 학교 너무 가고 싶어서 아이들 따라 갔다가 교장 선생님께 부모님 허락 받고 오라는데 그럴 수 없어서 한 없이 우신 이야기. 결혼도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냥 천주교 신자라는 것 하나만 믿고 결혼해 오셔서 더부살이부터, 직업 없는 아버지 곁에서 5남매를 키우시며 살아오신 이야기. 그 이후로도 한참을 당신 살아오신 이야기를 무려 4시간에 걸쳐서 하신 적이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마치셨을 때, 내가 어머님께 칠순때 꼭 어머님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써드리고 싶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벌써 어머님은 팔순이 넘으셨는데,나는 아직 어머님 자서전의 첫 문장 조차 쓰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님은 아들 사제에게 당신 인생의 총고해를 하신 듯하다. 사죄경을 외워드리지는 않았지만, 총고해란 것이 기억과 망각의 인생을 더듬는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에제 16, 1-50)은 마치 하느님의 총고해 같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생아로 버려진 아기로 비유해서, 그 아이를 데려다 씻기고, 키우고, 입히고, 먹이고, 자라면서 어엿한 여인이 되어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을 마치 엄마가 딸 아이를 챙기듯이 가꿔주시고, 나이가 들어 홀로 서기를 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명성에 도취되어 하느님의 자비를 잃고 불륜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자, 그런 이교도의 우상을 숭배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잊은 불륜의 이스라엘과 했던 영원한 계약을 잊지 않으신다. 그 이유를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분명히 밝힌다. "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1, 63)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세월이 흐르면서 잊어 버렸다. 하느님이 어떻게 그들을 에집트 종살이에서 끌어내셨고, 광야에서 단련시켜 당신 백성으로 맺어주셨는지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영광과 명성에 도취되어 하느님 없는 세상을 꿈 꾼 것이다. 망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하느님의 계약과 그분의 자비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마태 19, 3-12)에서 예수님은 지금이나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슈가 되는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건드리신다. 아니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모세의 권위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일종의 도전을 한 셈이다.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모세의 가르침에 대해 그 맥락을 잊어 버린 채 그들이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좋은 구실로 써왔다는 것을 단번에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일깨우신다. 본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해주신 하느님의 뜻은 둘이 한 몸이 되어 최초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는 공동체를 이루시길 원하신 것이다. 살다보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고, 인연을 맺는 것이 그들의 의지로가 아니라, 때로는 우연으로, 신비로운 방식으로 맺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남녀의 만남과 결합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신앙인은 그것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오늘날 결혼과 이혼에 대한 수 많은 담론들을 여기서 다 말할 필요는 없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오늘날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는 대부분의 부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처음 서로 만나 사랑하고, 신뢰를 약속했던 이유, 그리고 살면서 그래도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보다는, 지금 내가 불행한 이유,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드는 변화된 상황들에 대한 기억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다른 행성에서 온 남녀가 사랑에 빠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과거의 자신들의 삶의 상처들을 잊을 수 있었던 능력, 살면서 부딪혀온 상처들과 불행한 기억들을 세월 속에 묻어둘 수 있는 망각의 능력을 잃어버린 탓이다.


인생은 기억해야 할 것들과 잊어버려야 할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인생이 행복해지려면 잊을 건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 생활이든, 어떤 형태의 삶이든,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는 역설적인 삶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듯 싶다.


예수님은 결혼 생활이 가져다주는 여러 어려움들을 모르지 않으셨다.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혼인이 가져다주는 어려움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녀의 만남 그 자체가 신비이고, 하느님 사랑의 사건이라고 믿는 신앙인에게는 결혼의 가치 그 자체보다는 왜 결혼이 인간에게 어떤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 지를 살펴보라고 가르치신다. 과연 결혼 생활은 서로에게 인생의 최고의 이상을 발견하기 위해서일까? 만일 그런 이유로 상대를 찾아 결혼했다면 그 결혼생활은 파국에 이를 것이 틀림없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한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두 사람이 같은 인생의 목적을 갖고, 함께 길을 동반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채근하며,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행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 하지 않는 삶은 결코 미혼(未婚)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혼(非婚)도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싶은데 짝이 없거나, 상황이 안되서 하지 못하는 미혼의 상태가 아니라, 혼인 그 자체에 대한 목적보다는 혼인이 추구하는 더 궁극적인 목적에 직접 투신하려는 삶, 곧 종교적인 신념에 따른 비혼의 선택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는 표현으로 가르치신다. 물론 당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이런 삶의 형태가 여간 낮선 것이 아닐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고까지 말씀 하셨을까.


오늘날 성직자와 수도자들처럼 독신을 택한 삶의 바탕에는 오늘 이 복음의 말씀이 깔려 있다. 종교적 이상을 위해 독신을 택한 것이 여러모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존경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 우리 사회에서, 같은 이유로 교회가 위기를 느끼고 있다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사제 독신제나 여성 사제직이나 오늘날 여러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 이슈들이 분명히 달라진 세계관 속에서 여전히 복음적 삶을 지향해야 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는 꽤나 큰 도전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좀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 누구에게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그런 삶과는 다른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가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중요한 가치인듯 싶다.


기억과 망각은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천혜임에 틀림없다. 결혼 생활이든, 독신 생활이든, 자신이 그 삶의 소명을 처음 선택했을 때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산다면, 좀 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16. 8. 12.

무더위의 한 복판에


요즘처럼 폭염의 연속에, 시원한 바닷속이 그리워집니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