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미학 - 부활을 기다리며
송용민 신부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진리가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끌고 온 죄인 하나를 앞에 두고 빌라도는 고민한다. 자신이 소신을 갖고 심문해 본 예수가 의인임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위하여 유대인들의 소동을 막고 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줄 것인가. 무엇이 과연 진리인지 그에게는 혼동스럽기만 했다.
살면서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누구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세상 안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죽음은 우리의 가장 존재론적인 현실이고 진리이지만, 삶은 죽음을 유보해둔 채 오직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차 있다. 더 즐겁고 행복하게,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 우리는 몸부림친다. 그러나 살려고 하면 할수록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살기 힘든지 모르겠다는 아우성도 적지 않다. 물론 생을 넉넉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은 그야말로 축복이고 풍요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의 기쁨이 죽음에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란 진리를 올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빌라도의 고뇌 앞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단순히 진리를 '보여주신다.' 진리는 말로,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몸으로, 삶으로 체험되고 보여지는 것임을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여정에서 보여주신다. 말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온갖 모욕과 거짓증언, 배반과 채찍에도 굴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마치 인생에서 우리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압축시켜 놓은듯 그렇게 인간 삶의 모순을 한 몸에 받아들이신다.
때로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에 불만을 표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통해 인류를 그런 혹독한 방식으로, 아니 모순 투성이인 방식으로만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던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진리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잊으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죽음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존재를 위협한다.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만이 아니다. 사는 것이 웃음보다 눈물이 더 많아지고, 감탄보다는 한탄의 한숨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우리 영혼을 가로막는 순간들이 있다. 살면서 죽음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는 않아도,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도 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존재의 진리를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우리 삶은 더 고달파진다. 더 죽음에 가까워진다. 생명의 가치나 인생의 의미도 때로는 희미해진다.
하느님 구원의 역설은 여기서 발생한다. 죽음으로써 사는 것이다. 일종의 반전이다. 내가 죽기로 결심하는 순간 진정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를 원하신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결단이 있었기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완전한 자기 비움은 시작된 셈이다. 살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거부하고, 환생이나 윤회처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죽음을 넘어 더 강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죽음은 생명으로 넘어가는 희망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자발적 죽음이 요즘 현대인이 선택하는 그런 생명에 대한 경시나 현실 도피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철저하게 대속적 의미가 있음을 밝히셨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 5).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죽음을 모든 이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셨기에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 이것이 역설이고, 하느님의 방식이다.
우리의 자아가 짊어진 교만과 이기심,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할 수록 우리는 죽음의 그늘을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의 선배들이 보여준것 처럼 인생은 그 쓰디쓴 삶의 멍에들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할 때 새로운 생명의 빛을 본다. 모순을 인정하고, 내 죄를 고백하고, 내 삶의 허망함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선 희망이 언제나 우리 안에 자라고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바라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완전한 자기 비움과 봉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눈물 한 방울로 대지를 적시며 응답하는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의 한 장면을 되돌아보게 하는 날이다. 이제 침묵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받아들이신 죽음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신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침묵이다. 그리고 이 침묵을 깨고 어둠 속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실 그리스도,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 되시고,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한 부활 전례의 수많은 표징들이 담고 있는 부활의 의미를 조금씩 준비하는 시간이다.
2015. 4. 4.
성토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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