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강론

김레지나 2015. 5. 30. 04:08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강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풍요로운 세상이다.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들이 너무 많다. 한국 전쟁 이후 우리가 짧은 기간 동안 이룬 놀라운 경제 성장과 오늘날의 풍요로움은 과거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기근을 겪은 부모님 세대가 피땀으로 일궈놓은 근대화의 노력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 어디에 가서도 대우받고 경탄해 마지 않는 한국의 고도 성장문화 속에서 유감스럽게도 한국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산다. 마음은 불안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행복지수는 갈수록 떨어진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는 한국의 경쟁우위의 문화 구조가 비록 세상이 풍요로와지더라도 개인 스스로가 불행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풍요로운 먹거리와 즐길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목마르고, 배고프고,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끼는가? 아마도 그것은 우리 삶은 빵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양식을 필요로하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소개하신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신다. 그분의 살과 피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들은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다. 사랑, 기쁨, 인내, 희망, 용기, 호의 등 우리를 살게 해주는 힘들은 결코 그 실체가 직접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사람들의 말과 삶 속에서 그런 정신적 가치들은 우리에게 표징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실제로 우리 삶은 온통 세상의 표징들로 가득차있다. 그 표징들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사랑의 코드를 찾아낸다.

 

가령 들판에 핀 꽃을 생각해보자. 그 꽃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꽃 자체가 가진 메시지다. 하지만 이 꽃이 돈을 벌기 위한 화원에 놓여지면 그 순간부터 꽃은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꽃을 사러 오는 사람은 꽃장수에게는 자신의 경제고를 해결해줄 사람으로 비춰질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꽃을 사가는 사람에게 꽃은 더 이상 화원의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전해주는 훌륭한 표징이 된다. 그 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될 때 기쁘게 받아들일 상대를 생각하면서 흐뭇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이 꽃이 지닌 표징의 역할이다.

 

흔히 중년부부들이 결혼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애정표현이 쉽지 않다고 한다. 아내에게 꽃을 선물해서 자신의 사랑과 진심을 전하려고 해도 그 표현 방식이 적절하지 못하면 오히려 화가 되는 경우가 있다. 부부싸움이 흔히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인 것 같다. 나름 좋은 뜻으로 꽃을 사들고 간 남편에게 돈 낭비라고 그럴 돈이 있으면 현금으로 가져오던지 평소에나 잘하라고 구박을 하는 아내 앞에서 꽃은 아무런 사랑의 표징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정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젊은 부부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다가 어느 날 부인이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산삼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산삼을 구할 수 있는 경제적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남편은 아내에게 인삼 한 뿌리를 사주면 귀인이 나타나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산삼을 보내주었다고 거짓을 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인삼을 산삼으로 알고 정성껏 달여 먹은 아내의 병이 나았다. 남편은 너무 기쁘고 행복했지만, 한 편으로 아내를 속였다는 자책감이 남아 하루는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을 때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저는 산삼도 인삼도 먹지 않았어요. 단지 당신의 사랑을 먹었을 뿐이랍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표징 속에 담긴 참된 의미임을 알려준다.

 

월남전에 외아들을 보낸 늙은 어미가 무사히 아들이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다가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과 슬픔이었지만 이 노모가 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밥상을 차리면서 이미 죽은 아들을 위해 늘 쌀밥 한 공기를 밥상 맞은 편에 차려놓고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노모에게 아들은 비록 죽어 돌아오지 못했지만, 쌀밥 한 공기를 통해서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체험을 반복할 수 있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우리 삶은 표징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삶을 완성해주는 하느님 역시 우리가 직접 그분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의 십자가와 삶과 죽음, 그분의 말씀과 행적 속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을 체험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부활하신 그분의 성체 안에서 만난다. 우리가 매일 미사때마다 받아 모시는 성체는 단순히 가톨릭 신자라면 미사에 참석해서 출석도장을 찍듯 받는 그런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 작은 밀떡과 포도주 안에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담겨 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하시며 나눠주신 밀떡고 포도주는 곧 당신이 골고타 언덕에서 인류에게 내려주실 사랑과 생명의 생생한 표징이었다. 초대 교회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이 성찬의 제사를 재현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성체성사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가톨릭 교리 중의 하나는 '실체변화'란 말인데, 이것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사제의 축성 이후에 남아도 그 가장 근원에 속하는 실체, 본연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실체란 말을 실재란 말과 혼동해서 이해한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요소들이 사람의 살과 피로 변할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실체변화는 그런 뜻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백했듯이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길 없고 다만 믿음만으로 든든하다고 외치게 하는 성체의 신비를 뜻한다. 그 외적이 물질적 화학적 구조는 우리 눈으로 변화를 느낄 수 없지만, 그 밀떡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놀라운 사건을 말한다.

 

혹자는 그런 가톨릭의 실체변화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사실 이 문제로 16세기 교회분열이 가시화되었고, 개신교가 이를 우상숭배와 같은 미신적인 요소를 이해하는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여야할 것으로 가르쳐왔다. 하지만 성체성사 안에서 가자 중요한 것은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성체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펼쳐진 수많은 표징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것, 성스럽고 거룩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다.

 

이 힘은 본래 우리들의 감각을 통해서 성장한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영적인 것, 거룩하고 고상하며 초월적인 것에 대한 영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 기쁨과 자비를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갖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는 성체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가톨릭 신자라면 한번쯤은 아무도 없는 성당에 홀로 켜진 성체등 앞에서 예수님과 내밀한 대화를 해보지 않고서 결코 가톨릭의 매력을 알지 못한다. 성체의 신비를 체험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명기 말씀처럼 광야를 헤매며 불평을 일삼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빵 만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하는 운명을 깨닫지 못한 것과 같다. 그래서 성체는 가톨릭 신자에게 우리들의 영적 감각과 감수성을 성장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성체성사의 신비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이 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의 삶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가톨릭 신자들이 습관적으로 참여하고 모시는 성체성사는 2천년의 시간의 벽을 넘어 제자들과 함께 나눴던 최후의 만찬의 현장을 지금-여기서 체험하는 놀라운 사건이다. 성체를 받아모신 우리의 삶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삶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나의 말과 행동, 생각까지도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생긴다. 미사는 이러한 일치와 나눔의 삶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파견하는 주님의 희생잔치인 셈이다. 그래서 성체를 모시기 전에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공복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도 필요하다. 과거에 성체를 모시기 전에 24시간을 물조차 마시지 않았던 때와는 달라졌지만, 최소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실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은총지위에 머물 수 있고, 성체를 합당하게 모실 자격을 갖추는 것도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필요한 덕목이다.

 

우리 시대는 교회가 성체성사로 산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거행하지만 동시에 성체성사가 교회를 이루는 힘이 된다. 우리가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은 성체를 영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인 동시에 성체를 모실 때 비로서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말도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으나, 우리들에게는 천상의 양식이고 선물인 성체에 대한 합당한 공경이 우리 시대에 필요할 듯 싶다.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삶 속에서 잃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 것 같다.

 

공교롭게도 사제서품 14주년을 성체성혈 대축일에 맞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뜻 깊다. 사제직의 존재 이유가 성체성사에 있다면 오랫동안 서품 기념일을 교우들과 함께 보내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 받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을 느낀다. 사제로 살아가며 성체의 신비를 살지 못하면 내 스스로 져야할 책임이 많을 것 같아서이다. 성체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님께 청하고 싶은 주일이다.

 

2011. 6. 26

인천교구 삼산동 성당

송용민 신부

 

 

프랑스 루르드 대성당의 성당 천장 유리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성체를 중심으로 모여진 우리들의 기도가 연상되었지요.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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