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엮는 어부 되기 - 연중 제3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베드로에게는 일상의 하루였다. 그는 늘 그렇듯이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호수로 그물을 손질하러 나간다. 자신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젯밤 고단했던 일상의 이야기들, 살면서 지치는 일들, 막막한 삶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의 일상을 시작했을 베드로이다. 아마도 그 호수 근처에는 동료 어부였던 야고보와 요한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일상의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은 어제 보다 더 나은 수확을 꿈꾸고, 막연한 희망 속에서 오늘도 고기잡이를 위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을 듯 싶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근래 갈릴래아를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던 한 인물. 바로 예수였다. 그는 요즘 말로 꽤나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으로 통했고, 예언자라는 말도 들리고, 하느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소문도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가 나와 뭔 상관이 있겠냐 싶은 맘으로 오늘도 시큰둥하게 자기 일상에 빠진 하루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그들의 곁에 다가와 무슨 말을 했는지 복음서는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르 1, 17)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 이전에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갔을 것이다. 복음서는 중요한 핵심만 이야기할 뿐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더 이상 일상의 생계를 위해 투신하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 그러니까 사람을 얻는 사람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솔직히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의 이 엉뚱하게 들리는 말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 지는 잘 모른다. 단지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은 더 이상 그들이 뱃속을 채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찾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 뿐이다. 그물 보다 더 큰 이상. 많은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 안에서 만났다. 그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인생에는 부르심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고 있기에 우리는 산다. 나를 불러준다는 것은 나의 이름을 단순히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생의 어떤 관계에로 부르는 것을 뜻한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누구에겐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누군가의 부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나 또한 누군가를 부른다.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내가 그리운 사람을, 내가 도울 수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 우리는 서로를 불러주고, 부름 받는다. 단지 그 부름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인생에서 다를 뿐이다.
요나 이야기는 이런 면에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부름과 불림의 극명한 차이를 느끼게 해준다. 요나는 하느님께 부름을 받아 니느웨로 갈 것을 요청받는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요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들에게 저주를 퍼붇다가 자기 목숨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부르심을 외면하고 달아난다. 뜻 밖의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그 위기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는 또 다시 그 부름의 위기를 느낀다. 결국 그는 바다에 던져져 버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고래 뱃 속에서의 3일은 일종의 정화의 기간이다. 요나가 피해간 그 부름에 대한 응답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숙명의 기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나의 역할은 단순히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징벌을 예고하는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자기 생각의 틀에 박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니느웨 사람들의 반전과도 같은 회개의 실행에 적지 않게 당혹해 한다. 그리고 불평을 터뜨린다. 그렇게 쉽게 회개할 이들이였다면 자신이 그 죽을 고생을 하면서 거기까지 와서 회개를 선포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기준과 전혀 다른 자신의 옹고집에 묶여 있던 것이다.
살면서 가끔 내 인생이 요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부름 받은 것이 과연 하느님이 뜻하시는 사람을 얻는 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만 엮으려고 한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실상 사제로 살다보면 내 주변에서 나와의 관계를 엮으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 보다는 그냥 사제로서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고, 전자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끼거나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사는 것인지, 그들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분명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말씀은 요즘말로 사람을 하느님과 엮어 내는 일에 나를 도구로 쓰시겠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로 인해 사람들이 하느님과 엮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와 엮여서 상처 받고, 쓰러지고, 싫증내고, 무관심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이건 분명히 요나의 불평 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덥친다.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나라의 때를 선포하면서 하신 말씀이 어쩌면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 29-31)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소유하고 있는 사람, 내가 누리고 있는 상태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그것에 집착해서 하느님의 부르심 보다는 내가 필요할 때 누군가를 부르는 일에 더 익숙해지곤 하는 모습에 하나의 경종과도 같은 말씀일 듯 싶다.
누군가와 관계에 들어서는 것, 누군가를 나의 삶에 엮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해보는 때이다. 그것이 사랑이 될지, 집착이 될지도 언제나 물음처럼 내 인생에 남아 있는 듯 하다.
2015. 1. 25.
기를란다요, <첫 제자들을 부르심>,
1481-82, 프레스코화, 349x570cm,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성화 설명: 주보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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