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십자가를 사랑하기 - 십자가 현양 축일 강론

김레지나 2014. 9. 25. 20:00

십자가를 사랑하기 - 십자가 현양축일 강론

 

 

송용민 신부

 

 

 

주교회의 사무국장으로 소임지를 옮기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주말과 주일에 평소 7번에서 8번 미사를 교우들과 봉헌하던 때와는 너무 다르게 단 4명의 수녀님과 상주 신부님들 몇 분과 함께 하는 조촐하고 소박한 주일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일이면 늘 북적대던 성당 마당과 좁은 성당을 가득 채운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복음 묵상한 내용들을 거침없이 나누던 시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곳에서는 상주신부님들이 한 주간씩 돌아가면서 미사를 주례하시기 때문에 미사를 매일 아침마다 함께 해도 강론을 하는 일은 7주에 한 주꼴로 돌아오는 셈이다. 본당 신부들이 들으면 참 행복한 비명이라고 할 만하다. 어떤 신부님은 강론만 없어도 신부 생활 할만하다는 농(?) 섞인 이야기를 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것이 강론이라니 지금의 내 처지가 얼마나 행복해 보일런지.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지금의 이런 바뀐 현실이 아직 어색하고, 때로는 너무 큰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가 않을 듯 싶다. 늘 말 하는 자리가 많았던 삶 속에서 이제는 들어야 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조용히 다른 신부님의 강론을 경청하는 훈련도 해야한다. 본당 신부로 살면서 뭐든지 본당 신부의 말과 결정만 기다리는 신자들 사이에서 주목 받고 살다가 이 곳에서는 그야말로 무인도에 뚝 떨어져서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교님들의 회의와 교구 국장들의 회의, 다양한 위원회의 회의 내용을 준비하고, 경청하고, 정리하고, 이에 대한 후속작업을 행정적으로 확인하는 등의 일을 하다보니 이제는 말하는 일보다 듣고,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다.

 

인생에는 언제나 크고 작던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나 의무감 같은 것일수도 있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해야 할 부모로서의 책임일수도 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저마다 살면서 지닌 삶의 무게들이 있다. 때로는 내 삶 자체에 대한 무게를 느낄 때도 많다. 경제적인 곤궁이든, 내 삶의 모순을 견뎌야 하는 심리적인 상처이든, 관계의 단절로 인해 겪는 외로움이나 고독감일 수도 있다. 내 능력에 대한 회의나 내 존재감에 대한 부재로 겪게 되는 좌절과 상실의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인생은 누군가 말했듯이 고해(苦海)이다. 고통과 시련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바탕이라는 사실을 굳이 멋들어진 철학적인 표현을 쓰지 않아도, 살다보면 아이부터 노인까지 삶이 그렇게 내 뜻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고통은 왜?'라는 전통적인 물음 앞에 서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신의 '고해(苦海)의 인생을 '고해(告解)'하고 싶어한다. 내가 삶이 힘들다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들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내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고, 나와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고해는 어쩌면 그렇게 내 삶의 무게를 말하는(告) 동시에 그것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풀어내는 해석(解)이 늘 들어가있다. 누구나 내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해법 이외의 다른 방법이 있는 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인생의 무게들을 풀어내는 지 알고 싶어서 내 이야기를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법인가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삶의 무게를 흔히 십자가로 표현한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시련과 같은 삶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십자가라는 독특한 표징을 통해 풀어내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십자가는 2천년전 나자렛 사람 예수가 국사범으로 몰려 처참하게 처형된 로마제국의 사형틀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어떤 종교적인 거룩함보다는 인생의 가장 최악의 자리라고 여겨지는,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인간 파멸의 표징이었다. 예수님이 그 곳에 매달려 돌아가신 사건 그 자체만 본다면 처참하게 실패한 인간의 마지막 자리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의 영광의 자리가 되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자리이지만, 그분이 죄와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는 신앙의 확신 때문에 십자가는 더 이상 좌절과 고통, 실패의 자리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앙인에게는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었다. 성당과 집의 가장 중심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고, 내 몸 어딘가에 달려 있는 액세서리로, 장식물로, 그리고 기념품 가게의 선물로 주고 받는 표징들이 되었다. 개신교가 십자가의 고상을 우상숭배로 멀리하는 반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처참한 몰골로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십자가를 우러르며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십자가가 우리의 희망이고, 부활이며, 영광의 자리라로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십자가 그 자체는 영광스럽지 않다. 십자가가 아름다운 것은 그 곳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형상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 죽음 안에 담겨져 있는 희망의 표징과 목소리를 신앙의 감각으로 들어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삶에 지치고 힘들어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때 십자가는 하나의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내가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상처 받고, 외로움에 지쳐 삶을 포기하고 싶어할 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참으로 내게 실낱같은 희망이 된다. 그분이 나를 보라고, 십자가에 매달려 가시관을 쓰고, 못에 박혀 신음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라고 하실 때, 우리는 십자가에 담겨진 신비를 만날 수 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황후의 열정적인 그리스도 사랑의 결실로 예루살렘에서 찾아진 십자가로부터 유래한다. 예루살렘에 버려진 그 많은 십자가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말로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였는지 찾아내기 위해서 헬레나 성녀는 병자들을 데리고 십자가들을 만지게 했는데, 그 가운데 치유의 기적이 계속 일어나는 십자가를 보면서 확신을 갖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로마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십자가가 치유의 상징이 되고, 용서와 자비, 희망의 표징이 될 수있는 것은 우리 삶의 시련과 고통의 의미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때이다.

 

내 삶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묻는 일이 때로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고, 너무 뻔해서 그냥 일상 속에 묻어두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무게를 기쁘게 짊어지도록 초대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에겐 십자가가 삶의 무게만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예수님과 공감(共感)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는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이 삶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 우리 삶의 순간마다 숨겨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찾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이야말로 십자가 안에 숨겨진 부활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도록 초대된 이들이 우리이다.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한 낮의 햇살이 곡식을 익게 하고, 과일이 결실을 맺는 계절이다. 어제 청계천 광장에서 한국종교문화 축제에 김희중 대주교님을 대신해서 참석한 후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광장에서 여전히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지지자들의 농성 천막을 들러 보았다. 그들이 겪는 아픔을 잊자고 외치는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같은 공간 너머에 있는 우리 사회의 갈라진 양면을 보면서 세월호를 잊지 말자고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쳤던 그 시간의 의미를 잃게 만든 우리 시대의 리더십의 부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삶의 선물이자 축복이다. 희망 없는 인생이 많아지지 않으려면, 삶의 무게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분열과 분노, 이기심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을 춤 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내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는 하루가 되면 좋겠다.

 

 

2014. 9. 14.

주교회의 사제관에서

조용한 주일아침을 맞으며.

 

 

 

 

우리 사회의 아픔의 현장을 여전히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지켜주는 우리 나라가 정말로 하나가 될 날이 오길 기대해봅니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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