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기적 - 연중 제18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마태오 복음의 비유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밀과 가라지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 진주를 찾는 상인과 그물의 비유에 이르는 일련의 비유 이야기들을 주일마다 묵상해왔다. 과연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느냐란 물음보다는 언제 하느님 나라가 체험되느냐에 대한 예수님의 답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대한 물음에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하나의 표징과 같은 기적을 보이신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다. (마태 14, 13-21)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수백번은 더 들었을 법한 기적 이야기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가끔은 그게 어떻게 가능해? 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기적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적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신앙관이 전혀 다르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단들은 오천면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두고 하느님의 권능을 받으신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처럼 해석한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시는 예수님, 병자를 치유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이 그까짓 오천명이 넘는 이들을 빵으로 배불리시는 일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믿음으로 산도 옮긴다고 했지만, 요즘은 굳이 믿지 않아도 산을 파서 없애고 바다를 메꿔 땅을 만드는 세상이니 별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예수님께서 파견된 메시아임을 알리는 기적임을 강조한다. 흔히 개신교 목사님들의 흥분된 목소리와 높은 억양으로 "예수님께서 이토록 놀라운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시니 우리 모두 구원자 예수님을 찬미합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알렐루야~~!! 를 외치면 예외없이 개신교 신자라면 큰 소리로 '아멘'을 합창할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일종의 축복 논리에 빠진 신앙을 살기 쉽다. 그래서 자신이 청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은 개인의 영달과 축복이라면 신앙은 이기적인 자기애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 복음을 다르게 이해한다. 물론 복음서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오늘의 표징을 설명한다. 군중들이 굶주렸고, 제자들이 가진 것이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 뿐이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 19-20) 문제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먹였는지는 설명이 없다. 하지만 복음저자는 그것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단순히 자연 현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이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었기 때문이다. 표징이란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진 말씀이다.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을 위해 군중들을 돌려보내려고 했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고 하신다. 제자들은 보편적인 상식상 자신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 뿐이었기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해버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빵 5천개를 순식간에 만들어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그런 단순무식한 기적을 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산을 옮기고, 빵을 많게 하는 기적보다 더 힘든 기적을 사람들에게 체험하게 하신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아무리 탐욕과 이기심, 분노와 좌절이 판을 치고 있더라도, 자신의 순수한 영혼을 만나는 감동의 순간을 느끼게 해주는 예수님의 기도 안에 있을 수 있다. 우리도 살면서 어느 순간 인생의 참된 가치를 맛보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내 가장 내면의 순수한 모습을 보게 되지 않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하느님의 거룩한 영의 움직임이거늘 그런 감동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옹그라진 마음과 굳게 닫힌 가슴, 그리고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버린 자기애의 틀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만나곤 한다.
가령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그러하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2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이사 55, 1-2)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맛본 이들이 세상의 쓸모없는 것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탓하시지만, 동시에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의 넘치는 은총을 타인에게 나눠주고 싶어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면에서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놀라움을 매력적인 말로 찬미 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5. 37-39)
예수님은 아마도 그 많은 군중들 앞에서 이런 감동의 기도를 바치셨고,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먹으려고 싸온 음식들을 주변에 있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나눌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남들의 불행과 무관한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덜 먹고, 덜 가지더라도, 그것을 나눌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놀라운 행복이 자신 안에 선사된다는 체험을 하게 된것이다. 마치 엄마들이 배고파도 아이들이 맛나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안 먹고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란 표헌을 쓰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렇게 나누어진 빵은 오천명도 넘는 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남은 것을 모이느 12광주리에 가득찼다는 말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12지파가 그렇게 풍요롭게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것은 하나의 표징이었고, 그 순간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눔의 신비와 기쁨을 잘 드러내보여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을 이제 10일 앞두고 있다. 그분의 삶과 메시지가 전해주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과 교회의 소명은 오늘날 적지 않는 공감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얼마전 뉴스에서 교황님이 예고도 없이 교황청 근로자 식당에 불쑥 들어가셔서 줄을 서시고, 식판을 받아 반찬을 담아 근로자들 곁에서 식사를 허물없이 하셨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저 선거철이면 시민들의 편에서 표를 얻고자 하는 철새 정치꾼들과는 달리 교황님의 모습 속에서는 허물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 아마도 교황님은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보여주신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지도 모른다.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나눌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과 노동력, 내 마음과 믿음을 누군가에게 선사해주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놀라운 표징의 순간이 된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능력만을 믿던지, 사람들의 움직이고, 변화시키기 힘든 그 마음의 창을 열어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 참된 복음적 기쁨인지는 스스로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세상은 빵만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신앙인이라면 분명히 깨닫고, 작은 것 하나라도 이웃과 나누는 용기를 통하여 참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4.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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