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마음 밭 가꾸기 - 연중 제 15주일 강론

김레지나 2014. 9. 25. 19:54

마음 밭 가꾸기 - 연중 제 15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자주 쓰시는 표현이 하나 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 9)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알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란 표현으로 익숙해져있다. 귀가 있지만, 정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말 속에는 같은 말을 들어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이도 있다는 말이 된다. 소리는 들어도 그 말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아마도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가 공감하는 말 가운데 하나일듯 싶다. 수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과연 나는 얼마나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군중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손길과 말씀에 목 말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잡으려고 의심의 눈으로 그분을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도 그 비유의 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을 질책하곤 하셨다. 하지만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뜻을 깨달아 알고 살려고 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가감없이 듣고 이해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비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덕분이다.

 

  예수님의 이런 비유 이야기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해설이 뚜렷한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 1-23)이다. 밭을 일궈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 처음 좋은 땅을 택해서 밭을 일구며 돌을 줍고, 땅에 지력을 주기 위해 퇴비를 뿌려 밭을 준비해본 사람이라면 씨앗이 심겨져 싹을 틔는 그 신비로운 과정을 잘 기억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학적 영농법이 농사에서 더 많은 소출을 내기 위한 방법을 당연시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농업은 그야말로 뿌려지는 씨앗을 받아들이는 토양의 힘에 달려있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파종법의 경우 그 씨앗들이 어떤 것은 거리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질 수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상의 행동에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이고,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친다면 그 씨앗을 받아들여 싹을 틔우는 밭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한 마디로 마음밭에 따라서 하느님 말씀이 어떻게 성장하고 죽어가는 지 비유적으로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 뿌려진 씨앗은 마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같다. 좋은 말씀과 좋은 소식들이 넘치는 정보혁명의 시대에 현대인은 자신이 들어야할 이야기와 듣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를 구분하기 힘들어한다. 볼 거리가 넘치고, 들을 거리가 넘쳐도 정작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선별의 기준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있다면 때로 나의 생각의 편협함에 따라 제대로 보고 듣는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상을 손 안에서 들여다보는 시대지만, 그런 정보들을 자신의 내면에 담기전에 남들에게 보내고, 잊어버리는 모습들을 생각하면 길에 뿌려진 씨앗처럼 하느님 말씀이 우리 곁에 머물 여유가 없다. 바쁘다는 이유 안에는 잠시도 나 자신을 돌아다보고, 자신의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되새기는 일 조차도 번거롭게 여겨진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가 깊지 않아 흔들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천주교 신자들 만큼 신앙의 씨앗이 뿌리 내리기 어려운 이들도 없을 듯 싶다. 주로 예비자 교리이후 세례를 받고나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재교육이나 신앙성장의 기회를 자발적으로 갖기가 힘들다. 서로에게 관심이 적은 천주교 신자들의 특성상 나 홀로 신앙에 익숙하고, 미사 참례의 중요성만 강조하다보면 언젠가 의무감과 권태감에 쌓여 참된 말씀의 힘을 잃어버리기 쉽다. 뿌리가 없어 아무리 오랫동안 성당에 다녀도 조금만 혼란이나 상처가 생기면 쉽게 교회를 떠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가시덥불에 뿌려진 씨앗은 대부분의 신자들을 말한다. 사실 성당에 주일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들의 신앙 동기는 뭔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세상에 꼬인 일들을 풀어보고 싶어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듯이 믿음을 굳건하게 갖기에는 세속의 많은 유혹들과 걱정들, 재물에 대한 관심 때문에 신앙을 잘 지켜가기 쉽지 않다. 주일 전례참석에 익숙해져버려 개별적인 신앙 성장을 위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무시되기도 한다. 결국 세속의 경제적 어려움과 빈곤이 찾아오거나, 세속적인 즐거움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신앙은 거추장스러운 의무이고, 짐처럼 여겨질뿐이다. 신앙이 가끔은 여가생활처럼 여겨져서 시간과 여건이 되면 성당에 즐겁게 나가지만, 세상의 일과 부딪히거나 세속적인 사안이 더 중요하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준비가 되기도 한다. 우리 청소년들이 시험때만 되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모습을 보면 더 그렇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도 차별이 있다. 모두 좋은 땅이라고 같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열매를 얼마나 맺을 수 있느냐도 결국 씨앗을 키우는 밭의 힘에 달려 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도 사람마다 그것을 그 순간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하면, 성당 마당을 나서자마자 잊어버릴 수도 있다. 집에서 좋은 마음으로 가족에게 봉사하고, 열심히 살고 싶어하는 의지가 생기기도 하지만 속상한 일이 생기면 여지없이 그동안 받은 은총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느님 말씀의 빛을 받아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경우도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힘을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 11) 참 멋진 말씀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고, 힘을 주는 말씀이란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많은 시련과 유혹이 뒤따르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그분의 속량의 때를 기다리라고 격려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그 안에는 나와 내 이웃들, 그리고 내 삶을 지탱해주는 대자연의 숨결까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비록 피조물로서 겪어야하는 허무함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영광은 우리가 지금 함께 겪고 있는 탄식과 진통 속에서 새로운 빛을 보게 될 것이라 믿는다.

 

  가끔은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떤 밭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지 묻는다. 아무리 좋은 말씀의 씨앗이라도 그것을 내 밭에 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중요한 점은 내 마음의 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이다. 세상 살이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온 맘과 몸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내 영혼을 위해서 무심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지닌 양면성을 엿본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좋은 마음 밭을 일궈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하느님께 부름 받은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법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성호경에서부터 시작해서, 식사 전후기도,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 바치는 화살기도, 저녁에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하루를 돌아보면서 양심성찰을 하고, 미사 시간 전후라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거나, 성체조배실을 이용해서 살아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도 있다.

 

  좋은 밭은 좋은 마음에서 생긴다. 비록 내 자신이 하느님 보기에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기다리시고, 당신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기 보다는 조금씩 변화해가며 자신을 만나는 즐거움도 중요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표현 안에서 우리 역시 겪고있는 탄식과 설움을 하느님의 위로 안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주님께 청한다.

 

2014. 7. 13.

 

 

 

브뢰헬, <씨 뿌리는 사람이 있는 풍경>, 1557, 패널에 유채,
74x102cm, 팀켄미술관, 샌디에고 (성화 설명: 주보 3면)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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