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의 신비 - 연중 제16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요즘 마른 장마라는 특이한 여름 나기 때문에 농민들의 마음이 타들어간다. 강화는 올 여름 비가 오지 않아서 밭농사는 물론 식수난까지 겪고 있다. 게릴라성 폭우로 호우가 나는 곳이 있는가하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역도 있는걸 보면 우리나라 땅도 넓긴 넓은가보다. 아무리 과학적 영농법이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해도 여전히 하늘에 기대고 살아야 하는 운명 같은 우리 인생을 엿보는 계기가 되는 듯 싶기도 하다.
예수님은 당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땅 가꾸기 이야기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하느님 나라'란 말보다는 천국, 천당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천국은 마치 생을 마친 이후에 가고 싶은 곳처럼 여겨진다. 그곳에는 흔히 여호아의 증인들이 파수꾼이란 책자에 멋지게 그려 놓았듯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낙원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속에는 그런 천국의 표지는 없다. 하느님의 나라(=천국)은 "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24) 하느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곧 하느님께서 밭에 씨를 뿌리듯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곳에서 시작된다. 밀을 거두기 위해 뿌려진 밭에는 유감스럽게도 밀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새인가 가라지도 함께 자라기 마련이다. 밭을 가꿔본 사람은 잡풀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하는 밭일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제자들은 그런 가라지들을 미리 제거해내고 싶었지만 주인은 수확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자칫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 나라, 곧 하늘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간혹 세상 살이가 각박해지고, 내 주변에 미운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들을 가라지 같은 존재로 보고 내 곁에서 사라졌으면, 뽑혀서 없어져 버렸으면 이 땅에 행복해질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그런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없다. 내 기준에서 볼 때 남이 내 가라지라면 나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상대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살이에서 힘든 일 중의 하나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라지만, 정작 그보다 더 힘든 일은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세상 어떤 사람에게보다도 내 자신에게 참 너그러운 존재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여지껏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모순과 결함, 죄와 나약함들이 내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왔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나는 내 삶 속에서 밀만 키우고 싶은데 어느덧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않고 참 오랫동안 무던하게 그것을 참아내고 견뎌왔다는 사실이다. 남들의 잘못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남들을 탓하기는 쉽지만 정작 내가 그런 모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지우기 위해 남의 잘못만을 들추어내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재도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누군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와 끈기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내 기준이고, 내 한계에 부딪히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다. 세상의 흉악범들과 안면수심의 범죄자들이 날치는 이 땅에서 그들 없는 세상을 꿈 꾸지만, 정작 나는 내 자신의 악행과 모순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다르게 말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못난 나약함과 죄를 지켜보시면서도 곧바로 벌하지 않으시고 늘 회개의 때를 기다려주신다는 사실이다.
지혜서는 그래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이른바 의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인자함, 즉 너그러운 자비이심을 강조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지혜 12, 19)주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기다리지 못해서 안절부절하는 우리들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과 모순을 잘 견뎌주시고, 언제나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신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어떤 완전함이 보장된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함에로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는 작은 결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고자 하신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이런 하느님 나라를 향해 결단하는 신앙인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다. 작은 겨자씨가 나무로 커서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된다는 말이나, 작은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이 반죽을 부풀려 빵을 만들어 내는 신비처럼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말씀을 성장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그런 하느님 말씀의 힘과 그분의 나라가 성장하는 비결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과 신뢰이다.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자기애에 빠져 교만과 이기심에 눈이 멀어버리는 나약한 인간성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못남을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속마음까지 읽고 계신 하느님께 때로 너무 힘들어서 기도할 힘도 없다고 여겨질 때라도 하느님께 탄식하면서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청할 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 8, 26) 빠져나갈 길이 없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능력도 없다고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작지만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 찬 탄식으로 하느님을 향할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성령의 씨앗들을 일으키시고,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며 탄식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청을 간구해주신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은 삶에 있어서 절대적 요소이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상대화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삶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희망을 잃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나마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인생의 난관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결단을 하는 이들을 하느님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변화되지 않는다고 투덜대거나, 몇 번의 결심에도 번번히 무너지는 내 자신에 대한 좌절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서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내 노력과 결심이지만, 그런 작은 것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태도가 우리 시대에 절실한 것이다. 그런 작은 결심과 수행은 언젠가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성장시켜서 새들이 겨자씨 나무에 깃들어 쉬듯이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며 나로부터 힘을 얻는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우리 가운데 와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성령의 현존과 은사를 통하여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나라. 그분의 섭리와 사랑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작은 확신이 시작되는 곳. 바로 그 곳이 하느님 나라가 선포되고 시작되는 곳이다. 가라지 때문에 내가 성장할 수 없다고 불평하기 이전에, 그 가라지의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믿음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4. 7. 20.
페티, <가라지를 뿌리는 사람>,
1618-22, 패널에 유채, 60.5x44cm,
프라하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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