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 - 연중 제19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들 가운데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이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향해 호수위를 걸어오셨다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하느님의 권능을 지닌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오천명도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실 정도로 빵을 많게 하시고, 무서운 풍랑 위를 걸으시고 그 호수를 잠재우시는 모습을 보면 그분의 신적 권위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복음 이야기들을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칭송으로 알아듣고 끝낸다면 복음의 절반만 알아 들은 것이다. 진정한 복음은 이 말씀들 안에 숨겨져 있는 내적인 묵상을 통해 더 깊이 드러난다. 복음이 전해주는 참된 기쁨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예수님은 결코 그들에 의해 칭송을 받으러 머물지 않으신다. 오히려 산으로 들어가시어 새벽까지 아버지 하느님과 홀로 깊은 일치를 나누시며 기도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고, 때는 칠흙같은 어둠이 몰려왔고, 호수에서는 맞바람이 치면서 풍랑이 일고, 흔들리는 배 위에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호수위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면 안다. 그런데 갑자기 호수위를 예수님이 걸어오시는데 그분이 즐겨 입으시는 흰옷을 입고 오시니 그들이 "유령이다"라고 외칠만 하지 않은가? 밤에 산길을 홀로 가는데 누가 흰 소복을 입고 나오면 "귀신이다"라고 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 어둠과 풍랑은 제자들이 처한 가장 두려운 상황인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용기를 주신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베드로가 용기를 먼저 내서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손을 내미신다. 베드로도 복음서를 보면 잠깐이지만 호수위를 걷는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이 들자 여지없이 물에 빠진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 14, 31)라고 책망하신다.
그런데 이 복음에서 표현되는 것들은 모두 성경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밤, 풍랑, 잠. 이 모든 것들은 영적인 눈으로 보면 세상의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내 인생에서 잔잔했던 순간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삶의 풍랑을 만난 경험이 모두 있지 않은가? 영원할 것 같았던 부부 사랑이 금이가고,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부모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을 겪고, 시부모와의 갈등, 믿었던 교우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할 때 느끼는 당혹감들은 모두가 삶의 풍랑을 만나 흔들리는 배 위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을 상징한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인생 풍랑은 개인을 넘어 사회와 인류 전체에게도 오늘날 심각하게 펼쳐지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풍랑을 만나 쓰러지고 많은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부터, 군 폭력, 정치인들의 이기적 탐욕, 돈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과 폭력의 현실들,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 역시 곳곳에 전쟁과 폭력으로 힘든 참상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명분을 위해 팔레스타인의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를 폭격한다. 일본은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중국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되기 위해 물질만능의 정신으로 퇴락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손을 잡을 것인가? 풍랑을 만나 흔들리는 배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을 내미신다. 그분의 손을 잡는 것은 순전히 내 자유에 속한다. 당장 그분의 손을 잡는 일이 내게 힘들고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하느님의 모습 만큼은 영원하리라는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한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의 뜻은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만나던 순간과 비슷하다. 엘리야가 주님을 만날 때 거센 바람도, 지진 한 가운데에도, 심지어 불길이 솟는 곳에서도 하느님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자신만의 아집과 교만에 빠져서 내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엘리야 예언자가 체험했듯 하느님은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많은 삶의 시련과 고통이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의 말씀이 체험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주변에 영적으로 깨달은 이들은 대개 삶의 무게와 시련을 잘 견디고 난 이후 조용한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내시는 하느님을 만난 분들이다. 그게 진짜 영적 소통이다.
사도 바오로 역시 동족들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서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의 불충과 못남을 책망하시기 보다는 더 깊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사귀신다. 용서와 자비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줃요한 점은 그런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중심을 잡고 서 있느냐는 점이다. 나의 죄스러움을 깨닫기 이전에 내가 얼마나 무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를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다.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기를 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풍랑 속에서도 다시금 평화를 찾은 제자들과 같은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역사적 방한을 앞두고 있다. 그분이 종교적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일으킬 영적인 낮은 자로서의 삶을 어김없이 보여주시리라 기대한다. 그분의 삶과 메시지에 집중하라는 말처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진정으로 붙잡고 있어야 할 기둥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고, 주님게 은총을 청하는 한 주였으면 좋겠다.
201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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