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원천 - 대림 3주일 강론(자선주일)
송용민 신부
대림 시기. 대림환의 세번째 초에 불이 붙었다. 이제 10일 앞으로 다가온 성탄이다. 사회가 얼어붙은 탓인지 성탄의 느낌이 예전같지는 않지만, 어느 덧 성탄절과 한 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온 셈이다. 본당에서라면 분주하게 성탄맞이에 여념이 없을텐데, 새로운 소임지에서는 전례적인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보다 외적인 행사나 분주한 일정보다 마음을 추스리고 들여다보는 것이 더 필요하게 느껴지는 때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산다. 하지만 단순히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원리들 가운데 남성과 여성을 유독 구분해서 말하자면, 행복과 기쁨을 찾는 방식도 조금은 다르다고 한다. 남성은 보통 일의 성취감을 통해서 인정 받음으로써 기쁨을 찾고, 삶의 만족감을 갖지만, 여성들은 대개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풍성한 감성 속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다고 한다. 남성들에게 자기 중심적 성취감이 중요하다면, 여성들은 남을 돌보고 배려하는 것을 통해 돌려 받는 풍성한 사랑과 위로에 조금 더 민감하다는 말이겠다. 남자라고 그런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문화적으로 그렇게 각인된 것인지, 정말 남녀가 생물학적으 다른 감수성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기쁨 없이 생은 활력을 잃는다. 하지만 그 기쁨의 원천이 무엇이냐에 따라 슬픔과 좌절의 원천도 같은 것이 된다. 남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자신이 이룬 일의 성취감을 맛보지 못할 때 남자들은 좌절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실패감이 그래서 남자들에게는 독이 된다. 여자들에게 거절 당하고, 소외 당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자신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없고,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홀로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여성들에게 큰 아픔이다.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느낌은 아마도 여성들에게 더 공감 가는 말일 듯 싶다.
칼릴 지브란이 '예언자'란 책에서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종이의 양면과 같다고 했다. 기쁨은 같은 이유로 슬펐던 과거에 대한 보상이고, 슬픔은 같은 이유로 잃은 기쁨에 대한 반응인 셈이다. 사실 인생이란 그렇게 삶의 양면성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사실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다. 그 기쁨의 원천을 이사야는 어떤 세속적인 확신이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함께 하는 것' 안에서 누리는 확신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 1. 10) 모진 박해와 반대 속에서도 이사야 예언자를 일으켜 준 힘은 주님의 영이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할 때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의 원천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의 삶의 원천은 '성령의 불'(1테살 5, 19)에 있음을 강조한다. 삶에서 슬픔과 기쁨의 기로에 설 때마다 우리들의 방황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바오로는 성령의 불을 내 안에서 살리고 하느님의 말씀인 예언을 업신여기지 않으면 참된 기쁨을 식별할 수 있는 은사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 성령의 은사를 내 안에서 지속하기 위해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 테살 5, 16-18)라고 강조한다.
이런 기쁨의 원천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외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자신은 약속된 메시아도, 빛도,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척박한 땅이었던 광야에서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게 해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외치는 이의 소리임을 강조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도구로 낮추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셈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감성을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나 변덕스런 감정으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는 결국 이 감성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달려 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기쁨으로 바뀌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절망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정의 굴곡을 느낄 때마다 진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쁨은 어디서 올까 생각해볼 적이 많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의 신념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누군가와 떨어져 살지 않고 있다는 확신. 관계 속에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 내 자아가 결코 홀로 만족할 수 없는 관계적 존재임을 깨닫는 것. 그래서 주님의 영은 내 삶 속에서 그 관계를 맺게 해주고,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게 해주고, 관계 속의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해주는 식별의 영임을 일깨워주신다.
참된 기쁨은 일순간의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도, 실망 속에서도 참된 기쁨은 자신을 그 나락에 떨어뜨리지 않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다. 가끔은 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내 삶의 무게와 불안감이 나를 엄습할 때마다 내 편안함과 자유로움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삶은 그렇게 혼자서 자족하는 기쁨이 아니라, 누군가와 내 느낌, 감성, 신념, 사랑을 나눌 때 얻어지는 행복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그런 확신을 찾아가는 여정인듯 싶다. 성탄의 기쁨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생일의 의미가 아니다. 하느님은 초라한 마굿간에서도,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고, 외롭고 초라한 가운데에서도 늘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신비를 일깨워주는 축제이다. 그래서 성탄의 축제는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고,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늘 재확인하는 기쁨의 축제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선은 이런 기쁨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그들보다 내가 어떤 경제적 우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의 영을 나누는 세상적인 방식일 뿐이다. 최소한의 삶의 자리마저 잃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은 먼저 삶 속에서 생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고, 내가 더 부유할 수록 더 가난해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자본주의의 미신에 빠지지 않도록 영의 식별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는지, 나로 인해 기쁨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작은 손길을 내밀어줄 용기는 없는 지 다시 되돌아볼 때이다.
2014. 12. 14.
주교회의 소성당 제대 앞의 대림환입니다.
어느덧 초가 세 개가 붙었네요.
성탄의 기쁨을 좀 더 느낄 수 있는 날들이길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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