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병을 낫게 해주십사 청하려고 아일린 조지 여사 치유예식에 다녀왔다. 아일린 조지 여사가 내 쪽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셨다.
“There is a situation in your vocation. We all have vocations, mothers, doctors, fathers, lawyers, indian chiefs. There's gonna be a new change in your vocation. You had long (____)* time with it. It's been awful. Now you're gonna rejoice. I know you know who I'm speaking to. Praise the Lord Jesus Christ.”
"여기 어떤 소명과 관련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소명이 있습니다. 엄마, 의사, 아빠, 변호사, 인디언 추장 등. 당신의 소명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____)*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은 끔찍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당신이 알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언니의 암 치유라는 말씀만 기다리며 앉아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 'vocation change(소명의 변화)라는 단어만 기억에 남았다. 며칠 후 녹음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awful(매우 끔찍한)’ 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확 꽂히며 그 동안 맘 고생했던 내 상황을 너무 잘 표현한 단어라고 생각되었다. ‘vocation change’가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는 상황도 아닌데 게다가 그 변화가 ‘awful’ 한 경우라니. 내 쪽에 앉았던 약 스무 명의 사람 중 나 말고 또 있기는 힘들 것 같았다. 다시 들어보니 이번엔 'long' 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오면서 정말 내 얘기 같았다. 5 년간이나 지긋지긋했으니까.
나는 며칠 전부터 "하느님의 뜻" 영성을 배워 실천하고 있다. 신부님이 알려주신 대로 "하느님 뜻 안에서 잠이 듭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식사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기도합니다." 하면서 지내니 하느님께서 나의 작은 일상을 함께 해주시는 듯했다.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내가 처한 "situation"이 오랜만에 실감되었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하느님 뜻 안에서 awful 합니다." 하고 하느님께 말씀 드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동안 힘들었던 내 마음까지도 하느님 뜻 안에 있었다면 안심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순간 하느님께서 아주 가까이서 나를 감싸주시는 듯 했다.
문득 ‘하느님도 나에게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주시면 참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공지영씨에게는 유머를 해주셨다면서요? 저에게도 유머 하나 해주세요. 여러 수녀님, 신부님들도 하느님이 유머가 있으시고 재미있으신 분이라고 하시던데, 제게는 한 번도 유머를 안 해주신 것 같네요. 딱 지금 저한테 웃기는 유머 하나 해주시면 진짜 행복하겠어요."
무턱대고 졸랐더니, 이런 말씀이 마음에 들려왔다.
“awful’은 ‘awe (하느님께 대한 경외)’ 플러스 ‘ful(가득참)’이다".
깜짝 놀랐다. 하느님의 재치가 재미있어서 연신 웃음이 났다.
'내가 힘들어 했던 긴 시간들과 지금 하느님의 뜻 기도 안의 이 은총의 시간들을 다 알고 계시는구나.'
벌떡 일어나 사전을 찾아보니, ‘awful’은 ‘aweful’로 종종 잘못 표기가 된다고 했다. ‘awful’ 은 ‘매우 나쁜’이라는 뜻이지만, 어원이 ‘awe+ful’이고, 아주 드문 경우에만 초기 의미인 ‘full of awe’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했다.
여러 해 동안 awful한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면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고,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요즘 부쩍 그 은총에 감사하는 맘으로 지내던 참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유머는 재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적절하게 깊은 뜻을 담은 것이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는 awful한 상황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일이 된다는 생각에 박수를 쳐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일린 조지 여사가 하신 말씀이 나를 위한 예언과 치유의 말씀이라는 걸 직접 확인해 주셨다.
“소명의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
‘그래. 지나간 과거의 소명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갖고 잃어버렸다고 아파하지 말아야겠다. 이제 완전히 새로워져야겠다. 앞으로 무슨 일에서나 하느님 뜻과의 일치를 위해 희망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의 새로운 소명일지도 모르겠다.'
재치와 유머를 겸비한 매력적인 하느님 안에서 나는 새롭게 기뻐할 것이다.
2015년 12월 김유리아 씀 (엉터리 레지나의 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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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뜻 안에서 제게 한 말씀 더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성경을 펼치니 놀랍게도 다음 말씀이 첫눈에 들어왔다."
“얘야, 내 말을 듣고 지식을 얻어라.
내 말에 너의 마음을 기울여라.
나는 교훈을 정확하게 알리고 지식을 명확하게 전한다.
주님께서는 한 처음 당신의 작품들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것들을 지으실 때부터 제자리를 각각 정해 놓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작품들에게 영원한 질서를 주시고
제 영역을 세세 대대로 정해 놓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굶주리거나 지치지 않고 제구실을 그만두지도 않는다.
그들은 서로 부딪치는 일도 없고 그분의 말씀을 영원히 거역하지도 않으리라.” (집회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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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잘 들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에게 직접 들려 줬는데 do/studious/serious/tedious/hideous time (감금 생활/오랜 공부/심각한/지루한/끔찍한 시간) 등으로 들린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각자의 상황대로 각각 달리 들으면서 자기 이야기라고 기뻐하였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에서 옮깁니다.
“................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저를 봉헌합니다. 저를 다 가지시고, 그리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주소서.“
그렇게 말하고 나자 주인 무릎을 베고 누운 고양이처럼 나른해지기까지 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갔다.
“당신은 사랑의 신이시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가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전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야 그렇다 쳐도 제가 낳은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저 자신까지도요. 저는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이번에 그분은 침묵하셨다. 그러자 별로 더 드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아버지, 저를 봉헌합니다. 온전히 봉헌합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다 봉헌했는데 뭘 또 봉헌을 한다는 말이냐? 그럼 아까 봉헌할 네 것을 조금 남겨 둔 거냐?“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18년 만에 처음 찾아온 성당, 처음 들어와 보는 성체조배실, 나는 세 번째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 폭력의 흉터가 얼굴에 남아 입술은 부어 있고 얼굴의 시퍼런 멍 자국은 두꺼운 화장 아래로 시커머죽죽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그 부어터져 딱지 앉은 입술로 웃음이 나왔다. 순간 왠지 지금이 웃을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시 말했다.
“저기요. 이제 백 속에 휴지가 없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울면 코를 팡팡 풀어야 하는데 이제 그만 울게 해 주세요. 만일 또 콧물이 나온다면 집에 가야할 거예요.
그리고 침묵 중에 나는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울컥하는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콧물이, 늘 울기만 하면 눈물보다 많이 쏟아지는 콧물이 코 끝에 살짝 매달리더니 마치 보란 듯이 방울방울 하다가 쏙 들어가 버렸다. 신기했다. 그러자 울다 말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웃음은 내 입가로 더 번져 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가 웃는 것을 보고 너그러이 빙그레 웃고 계시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느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유머임을.
하느님의 유머!
어린 시절 나는 교리경시대회에 나가 상도 탈 만큼, 성경을 읽었고 신앙서적도 많이 읽는 소녀였다. 성당의 강연, 포콜라레 모임, 피정도 빠지지 않았다. 남들이 겨우 미사만 나오는 고3 때도 나는 주일이면, 하루 종일 가야하는 빈민촌 봉사를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한 번도 ‘유머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어떤 신부님도 그런 강론을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느님의 유머를 느끼자 이상하게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 환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왔다. 하느님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하시는 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분이다. 고정관념이랄까 하는 것이 깨어져 나가는 것처럼 통쾌하기도 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느님도 웃고 계셨다. 아버지 집에 돌아와 지난날을 부끄러워하며 울고만 있는 내게 웃음으로 위로를 주시는 분, 아, 이건 멋진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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