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과 춤을
미사에 늦게 가는 바람에(?^^) 평소와는 달리 앞 줄에 앉았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가까이서 바라보니, 살아계신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라고 하니, '춤의 왕'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고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있든지 나는 춤속에 너 인도하련다.
어리석게도 그들 좋아 날뛰지만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내안에 살면서도 네 안에도 영원히 함께 살련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고 멋있게 춤춰라"
http://blog.daum.net/ja618/7872278 (Lord of the Dance)
http://blog.daum.net/emsorl/261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춤추고 마시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시는 예수님의 건강한 모습이
저 아픈 십자가 위로 겹쳐 보이니,
마음이 아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성체를 들어올리시는데,
앞자리에 앉아서인지 성체가 유난히 커보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다."
평화의 인사 시간에
먼저 신부님께 마음을 담아 인사했습니다.
"신부님, 저 이제 집으로 가니 여기서는 마지막 미사이네요. 평화를 빕니다."
그리고 앞뒤, 옆 형제 자매님들과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인사를 마치고 제대를 향해 바로 서는데 환우들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요양하는 곳에서 곧 떠나니 섭섭해서 잠을 못 이루었다는 M 언니,
복수가 차서 항암을 시작한 예비신자 형제님,
아토피로 스테로이드약을 오래 먹어서 골반뼈가 괴사되어 입원한 자매님,
가족들을 죽을 때까지 용서 안 하겠노라고 선언해버린 딱한 자매님,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두 분 형제님..등등..
마음속으로 그분들 모두에게 인사했습니다.
"제발 평화를 빕니다."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제발 제발 평화 잃지 않으시기를 ..."
눈물을 글썽이며 십자가를 바라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아! 예수님은 진정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해주시려고 내어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깊은 감사와 사랑을 드렸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
저와 환우들과 아픔을 겪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이끄시어
당신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평화를 알 수 있게 해주세요.
큰 역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손 잡고 아픈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흥겨운 춤을 출 수 있도록"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 4:6-7)"
이하 2011년에 쓴 글과 2008년에 쓴 묵상글입니다.
폭풍 속에서 춤을
살다 보면 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붓고 바람이 무섭도록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역경에 처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흔히 “하느님의 뜻이라도 있기는 한답니까?”하고 따져 묻곤 한다. 하지만 높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분간해 내기도 힘든 일이려니와,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해서 폭풍우를 더 쉽게 견뎌낼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고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 투덜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최선을 다해 견디어 내는 것이리라.
재발한 암 때문에 한창 치료 중인 내게 본당 신부님께서 건네신 말씀이다.
“우리 삶의 여정은 언제나 고통과 행복이 함께 하는 것 같아. 그래서 인생은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 아니라 폭풍 안에서 춤추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영화 ‘왕과 나’에서 두 주인공이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는 장면과 배경음악인 “Shall we dance?"가 떠올랐다. 문득 ‘이 이미지와 노래야말로 지금 나의 최선의 모습이고 내 남은 삶의 주제가이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오래도록 ”Shall we dance?를 흥얼거리면서 신이 나서 헤죽거렸다.
그렇다. 폭풍우를 왜 겪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모르는 채로도 최선을 다해 견디면 될 일이다. 신부님 말씀처럼 고통 속에도 행복이 함께 있는 법이니, 폭풍우 소리에 가려져있는 행복의 멜로디를 찾아 들어봐야겠다. 그런 다음에는 그 멜로디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겠지. 나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주위로 눈을 돌려 보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떨며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에게 다가가야겠다. 엉터리 레지나식의 경쾌한 몸짓으로. 같이 폭풍 속에서 춤추자고 청해야겠다. 마음을 다해 두 손 잡아 이끌며.
“Shall we dance? ♩♩♩
저와 춤추시겠어요? ♬♪
숨어 있는 행복의 멜로디에 맞추어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2011년 11월 31일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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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묵상글도 붙입니다. http://blog.daum.net/ja618/6419025
왕으로 오신 예수님
본당 신부님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말씀이 하도 좋아서 옮겨보고 싶었는데, 길고 짜임새 있는 강론 어디 한 구절 허물어서 옮기다가는 오히려 좋은 강론에 누가 될까 싶어서 그만두었습니다. 신부님의 훌륭한 강론 덕에 교회가 대림절을 앞두고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기념하는 뜻을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왕의 모습으로 보고 있는가? 내가 뽑아준 신이니, 내 뜻을 언제나 들어주어야하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내 만족을 얻는 일만을 해드리고, 내 이익을 위해서 떼쓰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영광과 권능을 가진 정치적인 왕이기만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도 별 수 없이 예수님을 내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고 있는 군중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언제나 의심 없이 제게 왕이셨습니다. 그 왕의 이미지와 느낌은 조금씩은 달라져왔겠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 스스로 왕이신 분임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신자들의 왕, 온 인류의 왕이시기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제가 눈치를 보아야하는 분이라고 여길 때도 있었지만, 저를 위해 봉사해야하는 신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마땅히 찬미와 영광을 받아야할 하느님, 제가 모셔야할 하느님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생활로써 매 순간 체험하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예수님을 닮지 않으면 예수님의 왕권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다고 하니, 저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할 자격도 없는 참으로 부족한 신앙인입니다.
저는 종교를 고민해서 선택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걸까?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어른이 되어 신앙을 갖게 되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작년에 제가 글을 올리던 환우카페에 올라왔던 답글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병을 낫게 해 주신다는 계약서만 준다면 나도 하느님을 믿어보고 싶다.”는 답글을 보고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의 말들이 생각납니다. “나는 내 자식 잘되라고 기도하고 싶어서 세례 받으려고 해. 이제 웬만큼 키우고 나니 그것밖에 해 줄 일이 없네.”,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지, 지옥가기는 싫은데...”, “믿음으로 산도 옮긴다는데, 지금의 어려움쯤은 거뜬히 물리쳐주시겠지.”, “누구는 글쎄 교회 다녀서 병이 나았대. 그러니 지금 그렇게 열심히 안 다닐 수가 없겠지.”, “ 어느 한 종교를 택해서 의지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 위안도 주고...어떤 종교든 그게 그거일 걸...”, “세례 받았으니, 일단 안심이야. 당분간 좀 쉬다가 노후에 여유가 생기면 회개하고 성당 나가지 뭐. 바쁜데..”, “나는 지금 별로 기도할 게 없어. 아직은 내 생활이 잘 굴러가거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지 않아. 남들 피해만 안 입히고 살면 되지. 뭐.”, “뭐야? 또 하느님 이야기야? 그래, 그 하느님이 낫게 해 주겠다는 응답이라도 주시던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도움이 되는 왕이라면 신앙생활이 귀찮고 손해 보는 일 같기는 하지만 선심 쓰듯이 한 번 믿어주겠다는 식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다가 시련이 닥치면 손익을 계산하려들고, 쉽게 실망하고 냉담하게 됩니다. “내가 선택해주었는데도 나를 위해 해주는 게 없군. 신이 정말로 있다면 그러면 안되지. 없는 게 분명해.”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동기는 참 다양하겠지만, 많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의 승진을 탐하듯 구원티켓이나 하늘나라의 상급을 얻으려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거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보다 성숙한 지향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기적인 목적으로라도 신앙을 갖고 생활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길이 가까이 있으니까요.
신앙 안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맛볼 수 있으니 참 다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정해주든 인정해주지 않든, 스스로 왕이시고,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시는 왕이시고, 한없이 자비로우신 왕이십니다. 권능과 영광만을 가지고 당신의 전능을 행사하는 왕이셨더라면 이익을 좇는 추종자는 많았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우리가 마땅히 사랑하고 흠숭하고 찬미드릴 왕은 못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오시고, 당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시는 참 착한 왕이시기에, 진정한 왕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만이 보내주실 수 있는 왕이심을,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성경을 읽다보면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끔은 저도 왕이신 예수님께 당신의 권능으로 조금만 도와주시라고 조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쓰는 떼가 예수님의 외로움에 한 몫 보태는 일일 거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어떤 고난의 잔이든 받겠습니다. 피하고 싶지만...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지만, 그래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가 봅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너무 힘들어서, 한 고비, 한 고비 겪어야 할 때마다 실망하고 하느님께 심술냈던 기억이 있으니까요.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려 외로움을 맛보셨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염치없는 마음이 들면 “아, 예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칫!”하고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제 소원은 가장 고통스러울 죽음의 순간에 욥과 같은 기도를 온 마음을 다해 올릴 수 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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