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 떠날 때 찍은 겁니다. 이틀 더 자랐는데, 이십 센티가 넘고 가지가 풍성해졌네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생깁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다시 1년간의 항암치료를 끝낸 후로 벌써 8개월이 지났습니다. 심장 기능이 항암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고, 골다공증, 부종, 근육통 관절통, 호흡곤란 등의 부작용 때문에 치료를 중단하고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톱이 빠지고 15키로까지 붓는 부종으로 여러 달 동안 몇 발짝 걷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치료가 끝나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 덕분에 비교적 씩씩하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암을 마치고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차도가 별로 없고 조금만 신경을 써도 위가 몹시 아파서 책 몇 줄 읽기도 힘이 드니, 자주 침울해집니다. 속상하고 화가 날 때나 한두 시간씩 외출한 후에는 어김없이 부종과 근육통 등이 심해져서 덜컥 겁이 납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친정 가족들과 외식을 했습니다. 불어버린 몸에 맞춰 새로 장만한 큰 사이즈 옷을 투덜대며 끼어 입고, 예전의 삼분의 일밖에 나지 않은 머리카락이 흉해서 부분가발을 둘러쓰고, 삐걱대는 몸을 끄응~ 끌면서 따라나섰습니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식당의 정원에는 화려한 봄꽃과 연초록 나뭇잎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어서 마음까지 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아!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생명이구나.’ 한참을 멈춰서서 생명을 마시듯, 사랑을 마시듯,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습니다.
산으로 난 산책길을 걷다가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를 발견했습니다. 잘린 지 꽤 오래되었을 것 같은데, 남은 밑둥에서 새 가지들이 돋아나 연초록 잎을 달고 있었습니다. ‘우와, 신기하다. 아직 뿌리에서 양분을 얻나보다. 생명력이 놀랍기도 하지. 나도 쉽게 죽지는 않겠는걸.’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연초록 빛깔에 취해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몇 발짝 더 걸으니, 껍질만 겨우 몸통에 붙어 있는 부러진 가지가 보였습니다. ‘태풍에 꺾였을까? 이건 양분을 전혀 못 받으니 곧 말라버리겠다.’, 나뭇가지를 따라 시선을 옮겼는데, 가지의 끝부분이 땅에 닿아서 새로 뿌리를 만들어냈는지 새 가지와 잎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새 뿌리와 새 가지를 만들어낸 부러진 나뭇가지가 제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는 주님의 말씀을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꺾인 나뭇가지가 제 쓰러진 자리에서 생명을 도로 얻어 새 잎을 피워내듯 나도 꺾인 모습 이대로 기적을 피워낼 수 있는 거야. 내 건강을 회복해야만, 예전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만 내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건 아니야. 내 망가진 모습에도, 고통스런 상황에도, 두려운 걱정들 속에도 주님 사랑은 부족함 없이 깃들어 있어.’
건강도 병듦도, 죽음도 부활도 주님의 부족함 없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어야겠습니다.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니, 불평할 일도,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제가 아프기 전에 했던 일들에, 아프기 전에 품었던 희망에 연연해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있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의 제 모습을 이루기에 충분하니, 주님께서 제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모든 일을 마땅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말씀을 새롭게 알아듣습니다. 제 상황이 전과 같지 않고 앞으로 더 나빠진다고 해도, 주님의 충분한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힘을 낼게요. 제 영혼이 다시는 기가 꺾이지 않고 사랑의 싹을 돋우어내도록, 언제나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게요.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봄빛같은 사랑을 제 마음에 일깨워주셔서 고마워요.”
2013년 5월 25일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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