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5년

☆ 하느님은 부재 중?

김레지나 2015. 9. 16. 03:04

별채에 사는 M 언니는 4년 전 암이 발병하여,

거의 쉬지 않고 항암치료를 했는데도 계속 전이가 되고, 약이 잘 듣지 않아

최근에 좀 독한 약으로 바꾼 후에 부작용으로 많이 힘들어합니다.

온 몸에 검붉은 발진이 돋고 손톱, 발톱이 들떠서 잘 걷지 못하고,

입안이 헐고 구토증이 일어서 유동식으로만 끼니를 때우고 있습니다.

 

언니는 투병 기간이 길어지니, 하느님이 정말 계신가 싶고,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 따지고도 싶었고

냉담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겠다 싶어서 '성서 사십 주간' 공부를 시작했답니다.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적는 난에,

"하느님은 부재 중" 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기력이 없고,

목 이하로 검붉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왈칵 서러운 마음이 들어,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마시고, 데려가시려면 얼른 데려가시고

 너무 아프게 하지는 마세요."하고 기도하고 잠을 청했답니다.

 

꿈 속에서 누군가 언니를 깨워서 일어났는데,

언니 앞에 슬라이드 화면처럼 수많은 사진이 한 장 한 장 지나가더랍니다.

언니가 통증으로 웅크리고 있는 모습, 이런저런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모습들이 찍힌 사진들을

어떤 형체와 함께 한 장면 한 장면 넘겨보았답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언니의 인생 모든 순간들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곧...언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저는 이제 기적을 보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진정으로 저와 함께 해주셨군요."

 

언니는 아침에 형부에게 생시처럼 선명한 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형부가 "예수님이 혹시 낫게 해주신다거나 그런 말씀 안 하시던가?"하고 물었답니다.

언니는 큰소리로 대꾸했다지요. "그게 뭐가 중요해? 나랑 함께 해주신다잖아."

 

언니는 주일 7시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고 들어와서

주체할 수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감사기도를 드렸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부재 중" 팻말 떼고 "하느님은 함께 있음"으로 바꾸어야겠네." 

언니가 말했습니다.

"성서 사십 주간 공부에서 이제 욥기를 읽을 차례야.

 나는 욥기를 읽기가 싫었어. 하느님께서 뭔가 내가 원하지 않은 걸 요구하실까봐.

 이제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읽어봤더니, 욥기에도 '하느님은 부재 중이시다'는 말이 있더라고."

내가 말했습니다.

"욥이 그러지요.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라구요."

 

언니와 나는 펜션 근처의 한 정자에 누워서

욥 이야기, 고통이 사명인 사람들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

그러니, 우리는 우쭐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면서 킥킥댔습니다.

하느님 흉도 좀 보면서요.

"함께 있으면 뭐해? 아픈 거나 좀 덜하게 해주실 일이지.ㅋㅋ"

 

하지만 이젠 언니도 나도  하느님께 한걸음 더 다가섰음을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언젠가는 우리도 하느님의 질문에 기쁨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 하느님, 저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그 언젠가의 대화를 마음 속으로 그려보면

꼭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그리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저를 안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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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3) (원어로는 아가파오? 신적인 사랑을 하느냐? 라는 뜻이라고 함)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예, 사랑합니다."(원어로는 '필레오' 가족애, 의리, 우정을 뜻하는 사랑)

예수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agapao?)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예, 사랑합니다."(Phileo)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Phileo" 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그만 슬퍼졌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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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박진홍 신부님 강의 중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 저는 주님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으셔서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가파오?’하고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필레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필레오?’하고 물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에 다가갈 수 없으니 놀랍게도 하느님께서 우리들 수준으로 낮추어 다시 물어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울었을 것입니다.

(중략)

 .................................

 그렇게 기쁘게 지내다가 부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에 수원의 ‘말씀의 집’에서 한 달간 피정을 했습니다.

동기들이 저를 무섭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피정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대침묵 중에 동기들의 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깨질까봐 눈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 잠잠히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의 파장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잠재의식 속으로 깊이 깊이 잠기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세계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깊이 들어가서......... 발을 살짝 내디뎠을 뿐인데, 1초도 안되는 순간에 100개가 넘는 단어를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사랑하십니까?

“예”라고 대답하실 수 있는 분들은 행복하십니다.

저는 하느님께 “예”라는 대답을 지금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피정에서 기도를 하는 중에 눈앞에 선 하나가 천천히 그어졌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여섯 살,... 여덟 살.... 제가 지내온 모든 장면들이 그 선 안에 다 들어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심지어 7살 때 자전거를 배우다가 오른쪽으로 넘어져서 바닥의 더러운 이물질이 묻었던 기억도 보였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제가 그런 경우를 조심하면서 살게 되었고, 그 기억이 저의 어떤 성격을 이루는 부분이 되었고, 그 성격으로 인해 누군가의 어떤 말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되었고..... 부산사람이 충청도 신학교에 오게 되었고.. 신학교에 들어와 기쁘게 살게 되었고....... 그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하느님이 놓으신 포석이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굵은 선 하나가 그 선을 감싸고 따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전선의 피복이 전선을 감싸고 있듯이 굵은 선이 제 인생을 감싸고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쭈욱, 제가 어디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단 한 순간도 저를 놓치지 않으셨고,

서른두 살까지 겪은 모든 사소한 일들까지 감싸며 따라오시는 분, 하느님이셨습니다.

곧이어 제 마음에 말씀이 들렸습니다.

“사랑한다.”

저는 “예. 저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베드로 사도도 같은 심정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데,

저는 하느님의 그 사랑만큼 사랑한다고 할 수가 없어서, “예, 저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미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기에는 제가 느낀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 컸습니다.

감히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씀 드릴 수 없었습니다.

피정이 끝나기 전에 주님께 그 고백을 하지 못하면 부제품을 받지 못하리라 마음 먹고 몸부림을 치면서 대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피정이 끝나도록 “예,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 피정이 끝나고 각자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습니다.

“하느님, 저도............”

그러고 나서 저는 말을 잇지 못하고 20분 넘게 울었습니다.

다들 이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울먹이면서 겨우 이어붙인 말은 “사랑합니다.”가 아닌, “죄송합니다.”였습니다.

그 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하느님, 죽기 전에 한 번은 저도 ‘사랑합니다’ 라고 말씀 드릴게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말’로써가 아니라 제 ‘삶 속’에서 미약한 응답으로라도 한 번 사랑을 고백하고 갈게요.”

지금 이렇게 사제가 되어 살고 있는데,

제가 그 응답을 하기 위해 하느님께 다가서고 있는지, 아니면 멀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