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과 Y의 대화내용입니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전화통화를 녹취했다가 98% 그대로 옮겨적은 것입니다.
'맛이 간' 이야기인 줄 압니다만...^^
"에이씨, 십자가"
Y: 언니야. 내가 몇 년 동안 내가 지금 처한 현실이 너무나 부당하다고, 나는 분명 하느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믿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분별을 못하고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힘들더라고. 그래서 어제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하느님의 선하심까지 부정하게 되니까, 반드시 하느님과 이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너무 괴로웠거든.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왜 굳이 자기 잘못도 아닌 일로 저렇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 받으셨을까, 그래서 우리한테도 그런 부당한 고통을 참으라고 강요하시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 그래서 십자가상을 지날 때마다 예수님을 째려보고 가고 그랬거든.
근데 오늘 아침에 남편이 일찍 출근하고 아들이랑 같이 누워 있었는데, 아래층에서부터 누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남편이 문을 열어놓고 가서 누가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놈이 침대 머리맡에 잠시 앉아 있다가 내 몸을 무겁게 누르는 거야. 머리에 뿔 달린 검은 황소라는 느낌이 들었어. 분명 마귀인가 보다 싶어서, 구마경을 외웠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하고. 다른 때 같으면 구마경을 외우자마자 그놈들이 사라졌을 텐데, 이 놈이 꼼짝을 안 하는 거야. 아무리 구마경을 외우고 기도를 해도 안 되길래, 있는 힘을 다해서 그놈을 밀어내보았는데, 그놈이 꿈쩍도 안 해.
문득 뭔가 좀 더 권위있고 강력한 말이 없을까 생각했어. 내 맘 한 구석에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 “십자가” 그 ‘십자가’의 가치를 인정해야만 이 놈이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십자가”, “성혈” “그래, 십자가는 값어치 있는 거야.” “그래, 십자가”하고 외쳤어. 그랬더니 그놈이 싹 사라지는 거야.
그동안 내가 괴로워한 게 바로 그 문제였거든. 내가 하는 수 없이 내 십자가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겠다고 고집을 피웠었거든. 다른 사람 잘못으로 생긴 십자가를 왜 내가 안고 가야하는지 화가 나고, 다른 사람 잘못을 내가 뒤집어써야하는 것이 싫고, 성당에 하루 종일 나가서 봉사해도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하는 시큰둥한 생각이랑 싸우고 있었거든.
결국, 내가 그 십자가를 인정을 해야 악이랑 싸울 수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
L : 그래. 너 미국 갈 때, 갑곶성지에서 받은 말씀 있었잖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치를 잘 모르지만 받아들여야하는 몫이 있는 거야. 갑곶성지 말씀이 “물음표 십자가를 안고 가야한다.는 거였잖아. 그놈이 실제 마귀였는지, 니 꿈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경험으로 유익을 얻었으면 된 거지.
Y: 나는 다른 성지를 안 가봐서 몰라. 성지가 다 그런 메시지 주는 거 아니야?
L: 아니야. 갑곶성지 전체 메시지는 다른 성지랑 달라. 삼위비 앞 기도문에도 있었잖아. 네가 받은 말씀이라고 내가 인쇄해서 코팅까지 해주었잖아. 그거 다시 찾아서 읽어봐. 네가 아직까지 그 십자가 부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까, 하느님께서 그때도 성지 말씀으로 주시고, 이번에는 마귀습격을 허락하셔서 또 깨달으라고 하시는 거야. 하느님은 원래 반복해서 받아들일 때까지 심어주시거든. 그 부분을 인정해야 사랑이 느껴지고 감사가 느껴지거든. ‘십자가’ 문제가 머릿속에서 방해가 되면 니 신앙이 더 한 발짝 못 나가는 거야.
Y : 근데 나는 또 나름대로 옛날에는 언니가 말하는 것처럼 고통을 봉헌하는 기도를 잘 했다고. 사랑을 위해서 내가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데 더욱이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이 오면, 내가 왜 저 사람이 받을 은총까지 챙겨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기도하는 건 가능한데, 내가 원하지 않는 몫은 하기 싫고 이해하기도 싫어. 내 맘 속에서 우러나지 않는 건 하기 싫어.
예수님의 십자가도 정말 사랑으로 받아들여야겠다 싶다가도, 예수님도 그 의미를 조금은 모르고 돌아가신 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고 하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예수님도 잘 모르셨을 것만 같아. 하느님께 그러시잖아. 당신 뜻이 아니면 거두어주시라고. 그러신 걸 보면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 뜻인지 아닌지 백 프로는 모르셨던 거 아닐까?
내 문제는 그거야. 내가 겪는 부당한 일들이, 고통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는 것, 그래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 만약 하느님의 뜻이라면 왜 꼭 그런 식이어야 하나 불평하게 된다는 것.
L: 너는 네가 겪는 고통이 네 나약함으로 인해 겪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든 사실을 인정을 못해서 그러는 거야. 자존심 상하니까 인정하기 싫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을 거라고 우기고 싶고, 그렇게 우기려고 보니 하느님이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되고 그런 거지. 네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네 실수로 네 불찰로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거야.
니 그런 자존심까지 다 깎아져서 판판하게 되어야 하느님의 반석이 되는 거야. 베드로처럼. 베드로 사도도 죽음의 공포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잖아. 어느 면에서는 너랑 비슷한 상황인 것이. 네가 왜 쓸데 없이 안 좋은 일에 엮여들어가 당해햐 하나 못받아들이는 거야.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약하게 당하게 되니, 그 일에 엮어들어가는 게 두려웠듯이.
그 부분이 깨져야 니가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는 거야. 베드로의 회개는 누구한테나 끊임없이 필요한 거야.
베드로도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필요 이상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인 거야.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짊어져야 하나 하고 피한 거지. 그리고 왜 저 예수님은 바보같이 당해서 저런 끔찍한 길을 가야 하나 싶고. 분명 베드로가 아는 예수님은 능히 그러지 않아도 될 예수님이거든. 굳이 저렇게까지 겪으셔야 하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
베드로는 자기도 괜히 엮여 들여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이 일깨워주신 말씀이 기억나서 통회하게 되잖아. 베드로의 통회가 있었기에 ‘너는 반석이다. 너한테 교회를 맡긴다.’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거야. 너도 그 부분에서 깨져야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자질을 갖추게 되는 거지.
Y: 어렵다.
L: 베드로가 예수님이 수난 당할 때 동참해야 하고 변호해드려야 했었는데, 피한 거야. 나 그런 사람 모른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시던 예수님은 알겠지만, 저렇게 고통스럽게 당하는 예수님은 모른다. 나약한 모습으로 개죽음을 당하게 된 예수님은 모른다고 부인했잖아.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거야. 능력있는 예수님만 인정하고 싶다는 거지.
Y: 맞아. 딱 그 부분인 것 같다. 내가 왜 꼭 이런 힘든 길을 가야하나 하는데 대한 회의나 원망이 있어. 예수님도 전지전능하시다면 그 정도는 건너뛰고 좋게 좋게 일하시지, 굳이 저런 모습으로까지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지. 당신 죄도 아닌 죄를 힘겹게 짊어지고 가셨어야 했는지 받아들이기 싫은 거야.
L: 그래. 우리를 사랑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알지만. 저렇게 매맞고 당하고 서있는 예수님 몰라 하고 배반한 것이잖아. 그런 모습의 예수님이 낯설어서라도 모른다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계속 모르고 싶었던 거고. 그런 마음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일 거야. 너는 그때의 베드로와 같은 심정으로 계속 씨름하고 있는 거야. 누구나 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통과 예수님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싸울 거야.
근데, 우리는 정말 솔직하게 우리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성찰할 줄 아니까, ‘아 딱 그부분이 걸려있구나.’하고 깨달을 수 있는 거야. 그런 것도 저런 것도 생각 안 해보고 겉으로만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 심각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헤아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자’하고 미루어만 놓지. 그러다 위기가 닥치면 쉽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떠나고.
너는 지금 그 부분이 걸려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Y: 그 지적이 정확한 것 같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짜로 인정하고, 나도 동참을 하겠다고 동의를 해버리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겁이 나는 거야. 심각해지고. 갑곶 성지의 말씀처럼 물음표 십자가를 지고 갈 용기가 없는 거지. 이해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도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거야.
L: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잔을 마시고, 그건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한 일이고, 그건 닥친 후에나 걱정하고.
너는 우선 예수님의 선택이 어리석다는 생각을 고쳐야하는 거야. 나는 지금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 같지만,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그 고통의 길을 걸으셨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야. 너는 못하지만, 너는 무섭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인정할 수 있잖아.
Y: 예수님이 나한테도 엇비슷한 길을 걸으라고 할까봐 겁난다니까.
L: 하하. 뭐가 또 엇비슷하게 해. 오버하지 말고. 누구나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예수님처럼 큰 고통의 십자가는 아니야. 인간이 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이 인간의 몸에 갇혀서 똑같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지니고 사셨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인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제대로 짐작할 수조차 없는 일이야.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해.
먼저, 하느님 강생의 신비를 묵상해보는 게 필요해. 가령 우리가 지렁이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 아무리 사랑한다고 우리보고 지렁이가 되어 보겠느냐고 하면 누가 하겠어? 그치만 창조주 하느님이 하찮은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고.
Y: 예수님은 부활하셨잖아. 예수님이니까 부활하셨겠지만,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L: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말과 같은 말이야. 성경에 여러 번 나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서 누린다는 뜻이 아니야. 구원이 아니면 고통도 죽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부활 신앙으로 고통을 바라보고 죽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먼저 믿어야 해. 그런 후에야 우리의 십자가도 구원이고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돼.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우리의 십자가도 어리석고 바보같은 게 아니라는 거지. 십자가상을 보고 사랑을 느끼는 것이 신앙의 기초야.
Y: 나는 십자가를 보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안 느껴져.
L: 네가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걸려 넘어져 있으니까 그래. 그 어리석음이 사랑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은 거야. 하느님의 무능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거야.
근데 거기서 걸려버리면 신앙이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어.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만 좇고 싶다 이 말이지.
Y: 권능과 영광,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왜 우리를 힘겹게 하시느냐 이 말이야.
L: 근데 그게 사랑의 속성이라니까. 가치있는 사랑의 속성이야. 고통이 없으면, 좋은 것만 사랑한다면 가치있는 게 아니잖아. 의미도 없고. 사랑의 속성에 고통이 들어가 있는 거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남을 돕거나,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공부를 잘 하거나, 그런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잖아. 훌륭한 사랑도 마찬가지야. 성령호칭기도에 “고통의 가치를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있거든. 몇 년 전에 어느 날 딱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고통이 있어야 훌륭한 사랑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꼭 득도한 사람처럼 기뻐지더라니까. 말로는 쉽지만, 막상 자기에게 고통이 닥쳤을 때, 그 고통으로 훌륭한 사랑을 해보리라고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야.
고통이 은총이라는 말, 그런가보다 하면서도 힘겨운 과정을 거치는 건 다들 두려워하는 거야.
Y: 누가 고통은 축복이에요. 그러더라고. 고통 속에서도 축복을 받아보려고 미친 노력을 해야 조금 축복이 오려나?
L: 아니, 고통 속에서 따로 다른 축복을 바란다는 게 아니라, 고통 자체가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는 거지. 고통이 은총이라는 말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단순하고 믿고, 절망하지 않는 게 중요해. 고통이 은총으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가벼워지거나 줄어들지는 않아. 고통은 고통 자체로 실제적으로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런 믿음이 곧이곧대로 네 마음 바탕에 깔려 있는 것과 아예 말도 안된다고 거부해버리는 것은 달라. 고통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네 느낌이나 감각이 아니야. 그거는 이 세상을 섭리하신 하느님의 이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네 느낌으로는 여전히 싫어도 고통이 언젠가는 큰 사랑의 의미로 이해될 날이 있을 거라는 거지. 그런 단순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이 사랑으로 변화되고 온 세상을 위한 기도가 되고, 영원 안에서 영광스럽게 빛이 날 거라는 거지. ‘믿는 자’로서 고통을 겪고 ‘믿는 자’로서 부활을 희망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Y: 에휴~!
L: 니가 지금 그 부분에 걸려 있어서 그래. 너는 못하지만 예수님은 그랬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지 다음 단계 작업이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너한테 보여주는 것이야. 꿈이었는지 마귀였는지 모르지만. 네가 마귀를 쫓아내면서 “십자가, 십자가”하고 외치니까 도망갔다면서. 하느님께서 한 영혼에 유익할 때에 마귀의 공격을 허락하기도 하셔.
Y: 뭔가 황소같은 느낌이 들었어. 뿔달린 까만 황소. 내가 그 말 인정할 때까지 누르고 있어. 다른 때 같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물러가라” 하면 나가고 그랬는데, 꼼짝도 안 하니까 바로 떠오르더라고. “아. 내가 이부분 인정 안했지. 내가 이제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해. 에이 씨, 십자가.” 하고 외쳤더니 물러나더라고.
L: 크크크. 너무 재미있는 체험이다. “에이씨, 십자가”
Y: 하하. 그러게. 십자가를 이해 못하더라도, 나한테 오는 십자가도 이해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인정을 안 하면 저런 비슷한 놈이 또 와서 나를 괴롭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수없이 했다니까.
L: 맞다. 그런가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잖아. 십자가의 사랑과 가치를 인정했을 때,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살아가는 모습이 이미 달라진다는 뜻이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
Y: 그 부분은 이해했어. 근데, 사탄하고 고통하고 동격인가 싶고. 내가 000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게 싫고 화가 나는 거야. 미친 듯이 고집피우는 걸 보면 정말 마귀 같다니까.
L: 그래. 정상은 아니야. 내가 왜 그런 000000 못 받아들이는 거지. 불의를 행하는 것은 다 마귀의 꼬임에 빠져서 하는 거야. 네가 분별을 잘 못한 거지. 그래서 깨어있어야 하는 거야.
Y: 그 여파가 너무 커. 모든 과정을 하느님이 허락하신 거라면 받아들이겠는데, 그것을 잘 모르겠다는 게 문제야.
L: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이었든 아니었든 다 지난 일인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 어차피 겪어야할 일이라면 예수님 수난의 보혈에 일치하도록 봉헌하기로 하면, 그 고통이 영광스럽고 가치있게 되는 거고. 네가 그런 지향으로 고통을 견디어 낼 때, 그 혜택을 다른 사람들도 분명 받고 있을 거야. 네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네가 겪는 모든 일이 값없이 헛되이 버려지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작은 고통을 바쳤을 뿐이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후한 값이 매겨진다는 거지. 내 작은 고통이 뭐라고 이렇게 후한 값을 쳐주십시까?하고 감사하게 된대. 그런 믿음 하에서 세상을 사면 정말 값지게 의미있게 사는 거야.
내가 하느님을 떠나 있던 때에, 의미 없이 낭비해버린 세월들이 어느 날은 너무나 마음 아프게 후회가 되는 거야. 내 사소한 사랑과 고통까지 모든 것이 기도가 될 수 있었는데, 내가 하느님을 떠나 있어서 그 기회를 놓쳐버렸구나 싶었어. 우리는 우리가 겪는 일상에서의 모든 것들을 통해 얼마든지 거룩해질 수 있어.
네가 예수님 수난이 가치가 있고, 네 고통이 가치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네가 더욱 거룩해질 수 있는데,그 부분에서 걸려 넘어져 있으니까 하느님께서 마귀를 동원해서 너한테 깨우침을 주신 거야. 한바탕 쇼를 벌이신 거지. 아주 재미있는 하느님이시라니까.
Y: 응, 곰곰이 생각해보면 헛된 것은 없을 것 같아. 마음먹기에 따라서 거룩해질 수 있고, 내 고통들이 후한 값이 매겨질 것을 믿고, 그런 믿음을 통해 내 신앙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사실들을 의심 없이 믿게 되면 정말 완존히 기쁘겠다.
L: 너무 기쁘지. 그래서 기쁜 소식이라잖아. 영원한 생명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거야.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느님께서 내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내가 겪은 고통들의 가치를 알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사는 거고, 그게 기쁜 거야. 그런 믿음이 기본인데, 그 기본을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들 해. 베드로처럼 영광만을 좇고 싶어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피하려고만 하면 기본 단계에서 넘어진 거야. 근데 그 기본이 참 어려워. 성당에 오십 년을 다녀도 그 기본을 하지 못하기도 해. 딱 걸려. 베드로처럼 고통스럽고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면 못 받아들이고 배반을 하는 거지.
어떤 모녀가 성당 활동을 아주 열심히 했대. 작은 성당이라서 그 모녀가 없으면 성당이 안 돌아갈 정도로 많은 활동을 했다는데, 딸이 사고로 죽게 되자, 엄마는 화가 나서 성당에 안 나온대. ‘하느님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 그런 하느님 싫어.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하실 수 있어?’하는 마음이 든 거지.
우리 병원에 난소암 환우가 있어. 암유전자가 있는 집안이라 동생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한데도, 떠나기 2주일 전까지 평일 미사를 다녔대. 임종하기 전에 갑자기 눈을 뜨더니,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면서 “아멘”하고 말하고 환하게 웃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더래. 가족들이 뭐가 보이느냐고 물어도 이미 황홀경에 빠져있는지 대답을 안 하더래. 그렇게 임종하는 모습을 보면, 영생이 있구나. 하느님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을 텐데도, 남편이 성당에 나가지를 않는대. 인간적인 슬픔이 너무 큰 거야. 하느님께서도 이해해주시겠지. 시간이 더 필요할 테고.
너도 하느님과 씨름을 하고 있는 거야. 죽을 때까지 할 거야. 아마. 그렇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리석음이라고만 생각해버리면 그 단계에서 머물러 성장할 수가 없어.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머리로는 받아들이겠다고 작정해야 해. 네가 그렇게 결심하고 “성혈”하고 외치니까 마귀가 물러간 거잖아. 그걸 못 받아들이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마귀가 우리 영혼에 해가 되는 생각들을 불어넣기가 얼마나 쉽겠니? 그렇게 감정적으로는 싫지만, 하는 수없이 “그래, 십자가, 에이 씨, 십자가”하고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지
사실 말은 쉬워도 얼마나 어렵냐? 내 글 <주님께서는 제 행복을 통해 찬미받으소서>을 나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친구한테 보냈는데, 그 친구 답변이 <나는 니가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못마땅하다.> 하는 거야. 하하하.
Y: 나랑 같은 상태구만. 세상에는 화나고 짜증나는 일들 투성이지. 그걸 어쩌겠냐 싶어서 ‘에라이, 십자가’하고 외쳤더니 마귀가 물러가더라고.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 내가 그 가치를 인정하겠다.”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쳤거든.
L: 너도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못 받아들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하느님이 참 힘드시겠다 싶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처럼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훌륭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그걸 실천하는 사람이 너무 적을 거 아니냐? 내 자식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대부분 기꺼이 하지만, 그보다 더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그게 우리의 몫인데, 우리 마음에 맞는 만큼만 골라서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
하느님께서 니가 영적으로 깨어있게 하셔서 어떤 사명을 주시려고 작업 중이신 것 같다.
Y: 아이쿠. 싫다.
L: 잘 모르겠고 감정적으로 싫어도 일단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가 겪는 일들의 값이 달라져. 영원속에서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후한 값이 매겨진다는 거지. 우리가 준비된 후에 받아들이는 과제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과제가 먼저 훅 떨어지고, 그걸 평생 풀어가는 거야. 그걸 믿음 안에서 고민해보고 받아들이려 애쓰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을 때 차원이 달라. 예수님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거든.
Y: 종교가 있건 없건 사람한테 오는 인생의 굴곡들이 일정하다면, 종교라는 게 별 매력이 없어. 하느님께서 신앙 초반에는 사탕도 주시고, 그러다가 내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 책임지게 하시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것까지 짊어지도록 단계를 밟게 하시는 것 같아.
L: 사랑이 커질수록 그렇게 되는 거지.
Y: 처음에는 내가 힘드니까 하느님을 찾고 열심히 믿어. 그럴 때마다 하느님이 위로해주셔. 그러다 또 다른 숙제를 안겨주셔. 시련이 오면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부분 때문에 시련이 오나보다’ 싶어. 그런데 하느님을 제법 잘 알고 지낸다 싶을 때, 또 시련이 와. 그러면 이건 내 십자가인가 하고 받아들이기로 하고, 하느님과 다시 잘 지내. 굴곡은 똑같이 있는데, 내 상태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견디는 거지.
L: 신앙안에서 해석을 찾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십자가를 가볍게 하는지 몰라.
Y: 그런 것 같아.
L: 보통 암에 걸리면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걱정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어떻게 할까, 무엇을 먹어야 낫나, 죽는 게 두렵고 억울하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원망스러운 분이다, 그런 감정들에 휩싸여 굉장히 고통스러워 해.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고통의 크기는 비슷비슷할 수도 있지만, 신앙 안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 받아들이면, 고통이 더 견디기 쉬워지기도 하고 하고 은총도 될 수 있다는 거지. 예수님께서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셨잖아. 예수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지금 이 순간부터 사는 걸 거야.
Y: 은하수 저 밖에까지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수만 번 죽고도 남는 시간이 걸리니까 갈 수는 없잖아. 그래도 지금 동시에 존재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하찮지 않아.
L: 그런데, 그 하찮은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완전하게 사랑하신다는 거야. 어떻게 전능하신 분이 먼지같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못 믿는 거야. 그런 사실을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거야.
Y: 언니가 그랬잖아.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하느님이라서 더 좋다고.
L: 내가 언제? 기억 안 나는데.
Y: 언니가 하느님 사랑의 깊이, 너비, 높이는 측량할 수 없다고. 미래에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 알려주는 신들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지만, 하느님은 그런 차원을 넘어선 분이시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더 좋다고, 언니가 언젠가 그랬어. 이해할 수 있는 신은 우리가 매수할 수 있는 신이라는 말인데, 정말로 그런 신을 믿고 싶냐고. 이해할 수 없는 신이 정말로 우리가 믿고 싶은 신이 아니겠느냐고.
L: 기억이 안 나. 암튼 욥이 그 많은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 하느님께 그 의미를 딱 부러지게 안 가르쳐주시잖아. 고작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는 말씀 뿐이었어.
하느님 길은 저 위에 있다잖아. 그러니 욥이 깨갱 잘못했다 회개하잖아. 당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회개까지 시키신다니까.
Y: 그러게. 고생했다, 내가 시험했는데 잘 견뎠구나 칭찬도 안 해주시고. 하느님께서 “사실은 내가 너를 시험하려고 시련을 주었다. 잘 견디었다.”뭐,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는데.
L: 그런 대답이 도움이 안 되는게, 그러니까 왜 그런 시련을 굳이 주셔야 했느냐 하고 따질 수 있거든. 고통이 너무 심할 때는 그런 대답은 위로가 안 되는 거야. 그니까 왜 그런 엄청난 시련을 허락하시느냐고. 왜 십자가 죽음을 허락시고, 고통을 허락하시고, 대속적인 고통이 굳이 필요하시냐는 거지.
Y: 아니야. 나한테는 하느님의 그런 응답이 필요해. 하느님이 악을 통해 나를 시험하셨다고 말씀해주시면 마음 가볍게 받아들이겠어.
L: 그건 네가 분별해야할 문제야. 분별해야지. 전에 0000했던 일이 하느님께서 허락한 일이라면 유익한 일로 여기겠다는 생각은 네 억지야. 네 자존심일 확률이 높아. 네 불찰로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기가 싫은 거야. 하느님의 뜻으로 핑계를 대야 네 불찰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덮어버릴 수 있거든. 세월호 사고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듯이. <하느님께서는 악을 계획하시지 않는다.> 읽어봐.
Y: 욥의 경우에는 자기가 선택하고 말고 할 고통이 없었던 것 같아.
L: 그렇지 그런데 세상에는 알 수 없고 모르는 채로 그렇게 당하는 고통이 정말 많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악으로부터 오는 경우들이지.
네가 겪은 000일은 네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겠지. 000가 그렇게 악을 부렸으면, 니가 분별해서 거부했어야 하는 일이었지. 그걸 주어진 그대로 하느님의 뜻이려니 하고 방치해놓고, 그 일로 인해 힘드니까 지금 심술이 난 거야. 신중했어야 할 사람은 너이지, 하느님이 아니야.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순명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을 헤아려주실 거야. 네가 모르고 한 거니까 네 과오가 되지는 않을 거야.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점은. 악은 대개는 나쁜 짓하라고 시키지 않는대.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아라. 했지. 그게 나쁜 짓은 아니잖아.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했을 때, 나쁜 짓이 되는 거지. 돌이 빵으로 되어서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하는 거, 그것 자체는 좋은 일이잖아. 어떤 일을 분별하고 결정할 때, 네 마음 속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해. 그 일 자체가 옳냐 그르냐 하는 것보다.
Y: 내가 분별을 잘 못해서 이렇게 힘들게 되었다면, 에휴, 이를 어째?
L: 너는 왜 지나간 일 갖고 그렇게 몇 년을 매달려 있냐? 계속? 이 마당에?
그럼 나같은 사람은 얼마나 못 받아들이고 화날 일들이 많겠냐? 00도 그렇고 00도 그렇고. 잘못된 원인 따지고 매달려 있으면 너만 손해야. 지난 일들은 따지지도 말고 그냥 십자가로 받아들여야하는 거여. 처음에 어쨌건 간에 그 결과는 니 몫이니까.
지금 니가 겪는 시련에 대해 니 잘못인지 하느님 잘못인지 따져보겠다는 거잖아. 최소한 하느님께서 너한테 힌트를 주지 않으셨다고 속상한 거고. 갑곶성지 말씀처럼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대개가 물음표 십자가라고. 물음표 십자가인 채로 지고 살다보면, 언젠가 그 의미를 알게 될 거야. 느낌표 십자가가 아니라 물음표 십자가라니까
그리고, 네 억울한 희생이 000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했던 거야. 하느님은 너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000도 사랑하시거든. 내가 보기에는 너를 통해 그를 변화시키고 싶으셨던 것같아. 너는 그가 미우니까 아직껏 니가 겪는 시련이 용납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하느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응답해주신 것 같다. 이해도 안되고 용납하기도 싫지만, “에이씨, 십자가”하면서라도 받아들이라고. 친절하게.
Y: 맞네. 알았어. 그러니까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알았다고 받아들이면 해결되는 거지. 가슴에서 그 무거운 돌덩이가 사라지는 거야. 황소같은 돌덩이가 사라지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마음의 돌덩이는 내가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거야. 인정만 하면 사라지는 거야.
결론은 그거네. 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는 거. 십자가 의미 있는 거다. 내 십자가도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걸 단순하게 믿으라는 거네. 감정적으로는 싫지만 의미 있는 거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에야 가슴에 얹힌 돌덩이가 사라지는 거야. 내 평화를 방해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사라지는 거지.
L: 그려. 이왕 얹혀있던 돌덩이들, 그런 방법으로 하나씩 내려놓으라고 계속 쌓아놓지 말고.
Y: 우리 성당에 여기 수녀님 지망생이었던 분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어떤 성녀가 예수님 말씀을 받아적으셨는데, 천사가 나타나 불태우라고 했대. 그래서 불태웠는데, 알고 보니 마귀였대.
L: 그거 파우스티나 수녀님 이야기인데. 파우스티나 수녀님 일기도 불태우고 나서 다시 쓰셔서 순서가 좀 뒤죽박죽이 되었대.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는 분이셨는데도, 마귀가 천사인 양 나타나 그런 엄청난 명령을 하는 것을 막아주시지 않으셨다니까.
Y: 파우스티나 수녀님이 아니고, 다른 성녀 이야기인가 봐. 마귀가 주교님한테 속삭여서 불태우라는 명령을 하게도 했다는데.
우리가 분별하기 힘든 일에, 분별하지 못해서 순명하는 것은 공이 될 수 있는 거래.
분별하려고 애쓰다가 자신의 욕심으로 잘 분별했다고 생각하고 버티며 순명 안하는 것보다는 틀린 분별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순명하는 것이 더 낫다는 거야. 아까운 걸 불태우고, 다시 그 수고를 해야 하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명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L: 성인들이 마지막으로 걸려 넘어지기 쉬운 단계가 바로 ‘순명’이래.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하는 장상이나 천사에게 순명하는 거야. 우리가 지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순명하는 것이 중요해.
Y: 그래, 나한테 모자란 건 사랑이고 순명이다. 사랑이 넘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쁠 텐데. 여기서 사람들이랑 가족같이 가까이 지내니까 치명적인 단점들이 보이는 거야. 저런 인간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싶을 때가 있어. 그래도 내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말이야.
L: 그렇지, 너한테도 나한테도.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할만한 정도만 사랑하겠다고 버티면 네 손해야. ㅎㅎ‘에이씨, 십자가’라고 생각해.
Y: 다 통해 있어. 십자가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믿음이 굳건해야 여유가 생기고 사랑도 생길 텐데. 믿음이 먼저야.
L: 그래서 우리가 죽기까지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된다잖아.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을 걸.
Y: 옛날에 나는 요 정도만 사랑하면 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야. 더 크게 사랑하라고 계속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내가 안 받으려고 버티면 나만 더 힘들어져.
L: 그렇지 그렇지. '좁고 험한 길이지만 갈수록 편한 길. 예수님이 나를 그 길로 인도하고 있다 하셨어. 우리 모두를 그 길로 인도하고 싶어하시겠지. 예수님이 제시한 길이 진리이고 생명을 얻는 길이야.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잖아.
Y: 우리는 그 길로 이미 들어섰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야 돼. 신앙의 길이 게임이랑 같대. 레벨 원에서 내가 엄청 잘해. 아주 편안해. 오케이 하느님 좋아요.라고 해.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딱 그 판을 걷어가셔. 다음 레벨 투, 이게 뭔가 싶어서 막 투쟁해서 레벨 투의 도사가 돼. 그럼 다시 하느님께서 레벨 쓰리 판을 깔아주셔. 좌충우돌 헤매다가 겨우 선수가 돼. 하느님하고 사이가 더 좋아져. 그런데 다시 레벨 포, ‘이건 또 뭐야’ 싶어. 어떻게 풀지?“ 막 이러고 싸우는 거야.
L: 하하하. 엄청 재미있는 비유다. 으허헝.. 맞아. 싹 치워가셔. 어느 순간.
Y: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정말 하느님하고 친했었거든. 이렇게 살면 될 것 같고, 기도 속에서 하느님 만나고, 내가 뭐라고 하면 하느님께서 콩당콩당 다 대답해주시고, 우리 하느님 최고다 하고 살았거든. 이렇게만 살면 어떤 일도 다 잘 해낼 것 같고 해답을 얻을 것 같고 그랬는데, 그 모든 장치들을 싹 치워가 버리시더라고. 나에게는 너무나 완벽한 세팅이었는데, 하느님하고 나하고 만나는 은밀한 장소도 있었고.
새로운 세팅에 적응하려면 "그래, 십자가“하고 먼저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는 게 중요한 것 같아. 내가 십자가의 가치를 인정할 때까지 협박을 받은 거잖아. 예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이제는 사라졌어. 십자가 지나면서 째려보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레벨의 입구에 놓인 장애물 하나를 이런 식으로 치워주셨네.
L: ‘황소 마귀 쇼’를 통해서. 하하. 레벨 좀 살살 올려달라고 해야겠어. 갈수록 편한 길로 이끈다고 하시더니, 우째 갈수록 편하지 않아. ㅋㅋ
Y: 그래도 언니는 더 이상의 십자가 싫다고 해. 주는대로 받겠다고 하지 말고.
L: 알았어. "No more, thankyou."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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