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신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둔 한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신앙은, 신적인 존재는 인간이 만들었을 수 있다는 화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고 신학교를 나왔는데
살다보니, 먹고 살기 바빠서 신적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존재하시는가?
하느님께서는 어떤 영적 존재들 중 한 분이신가? 아니면 창조주이신가?
어릴 적 세례를 받고 하느님은 계시다는 생각을 당연히 갖고 살았던 제게도
하느님이 제게 응답하는 신이기는 하지만 창조주이신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난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령 세미나를 받고 심령기도를 하고
천상의 소리같이 아름다운 멜로디에 감탄하며 영가를 부를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영적인 체험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별개이더군요.
그렇게 마음 한 켠에 불신앙의 씨앗을 갖고 지내다가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그것도 사랑이심을 한 순간에 온전히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6년 일기에서 적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임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일부러 뜻밖의 시간을 골라서,
제가 자다 깨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화장실 변기에 막 앉았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의지를 주었다. 그것도 내가 준 것이다."
강렬한 감동? 아니, 감동이라는 표현으로는 약합니다.
지성과 감성과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전해지는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충격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런 말씀이 제 내면에 미리 저장되어 있다가 그 순간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몰라도 그런 충격을 몰라도 너무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나 강한 충격인지, 듣는 순간 동시에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부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말씀 한 마디로 제 맘속에 남아 있던 먼지 한 톨만한 의심까지 싹 태워없애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왜? 어떻게? 굳이? 믿느냐구요?
<하느님이 실재로 계시니까> 믿게 된 것이라는 말 외에, 다른 설명은 찾지 못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낸 존재가 분명 아닙니다.
하느님은 진짜로 온 세상을, 온 인류를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상 무수한 사람들이 신앙 고백을 위해 순교하셨습니다.
거짓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증거를 보아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면 좋을 텐데....
그러게요.
하느님이 계신 걸 어떡하란 말입니까?
---------------------------------------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나서 출근하는 동생에게 인사를 하지 못했다. 아침밥을 꾸역꾸역 먹고 처방대로 팔운동을 열 번씩 했다. 잠시도 깨어있기가 싫어서 밥 먹은 후의 포만감을 이용해서 억지로 잤다.
한두 시간을 잤을까. 비틀비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변기에 막 앉았는데 내 마음으로, 아니 온 몸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에게 의지를 주었다. 그것도 내가 준 것이다”
놀랍게도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스쳤다. 병원에서 수술 후 교육을 받을 때 보았던 환우들의 차분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야 하느님 덕에 이렇게 웃고 있지만, 저 사람들 다 하느님을 믿는 건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밝은 표정일 수 있을까?'하고 잠시 놀라워했던 기억이 났다.
‘아, 하느님께서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게 아니구나. 고통을 이겨나갈 의지를 부어서 만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구나.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셨구나. 그런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견디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된 엄청난 충격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설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깨달음에 대한 감격과, 앞으로는 내 의지로 이겨내 보라는 주문에 대한 섭섭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울음이 터졌다.
‘내게 주신 기쁨들은 내가 찡얼대는 게 불쌍해서 주신 건가? 이렇게 괴로운데 어떻게 내 의지로 버티라고? 고통을 제대로 겪어보라고? 하느님, 너무 일러요. 조금만 더 업어주시지. 벌써 혼자 서라니요? 다시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안 주실 것 같아요. 저만 좀 특별히 챙겨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요. 무섭다구요.’
가족들이 들을까봐 샤워기를 틀고 꺼억꺼억 울었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으니, 두려움은 희미해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은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고마움이 따스한 빛이 되어 내 마음을 환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같은 빛을 주고 계신다는 당연한 사실을 섭섭해 하다니.
성당에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저 고약한 인상의 아줌마, 저 못나 보이는 학생, 모두 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만큼의 의지를 갖고 창조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가?’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사랑하시니, 우리 모두는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성체조배를 하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말씀드렸다. 과분한 은총을 입은 것에 대한 감사만을 온전히 드려도 모자랄 텐데, 자신 없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남아있어 훌쩍이고 있는 것이 정말 죄송스러웠다.
성당을 나오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좀 전에 보았던 인상 고약한 사람이 그지없이 훌륭하게 보였다. 모든 게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부식가게에서 다듬어지는 고등어를 찬찬히 지켜보면서도 ‘우리를 위해 창조된 귀한 피조물이구나.’하고 흐뭇해했다.
집에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하느님이 기쁜 마음을 더 이상 허락하지는 않을 것 같아 힘들다고. 기도는 부탁하지 않았다. 주시는 대로 다 겪어 볼 작정이었다. 엄마가 컴퓨터 옆으로 와서 내 눈치를 보셨다.
“무슨 일 있었냐?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처럼 보인다. 어제 그제 죽을상을 짓고 있더니만”
“하느님이 이제 그만 업어 주시겠대요. 나 혼자 서래요.”
대답을 길게 할 수가 없었다. “으앙~”하고 울음이 터졌기 때문이다.
“언제 그러셨는데?”
“오늘 아침에요”
“너 그거 오버한 거다. 하느님은 너를 끝까지 업어주시지. 니가 잘못 이해한 거야”
물론 그러시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무튼 그만 조르라잖아요.”
주님께서는 부족하기만한 내게 사랑을 일러주셨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그리고 ‘믿는 자’가 되어라.“
그래서 세상에 외칠 수 있게 하셨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그날 이후에 적었던 메모이다. 비공개로 되어있던 건데 다시 풀어 올긴다.
2월 25일에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고찰
일부 신앙심이 두텁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결정을 할 때도 하느님께 응답해주시라고 기도하고, 기도 후에 떠오르는 생각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늘 쓸 데 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이성이 작은 결정조차 못할 정도로 부족할 리 없을 테고, 하느님께서 그리 한가하신 분은 아니리라고 짐작했다. 하느님이 직접 말씀을 주시는 경우도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기도를 했더니 응답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 일부는 자기들이 애초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기도 후에 다시 떠올려 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믿는 것이리라 여겼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수시로 들을 만큼 신앙심이 두텁다고 믿고 뻐기면서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판단하는 말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직접 하느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 중 일부는 터무니없는 자기네들의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2월 25일 아침에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인식한 체험은 내 신앙의 역사상 가장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이었다. 나는 자고 일어나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고 기도하는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분명했다.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구나,하는 온전한 확신이 동시에 들었었다.
“내가 너에게 의지를 주었다. 그것도 내가 준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더구나 내 의지로 혼자 서라는 말은 전혀 원하지도 않았고 상상하지도 않은 응답이었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떠올린 말일 리가 없었다.
하느님의 말씀임을 인식하자마자 어떤 소리인지 곰곰이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정말 하느님다운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사하고 놀라는 대신 두렵고 섭섭해서 계속 울기만 했다. 긴 항암기간 동안에 내 의지로 버티라는 하느님의 주문이 너무나 가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감격하는 대신 하느님을 원망하고 마치 하느님이 나를 버리기라도 하시는 양 무섭기만 했다. 그리고 설날에 체험했던 기쁜 마음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고, 다시는 하느님이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느님의 말씀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내 이성은 '하느님께서는 의지를 주어 만드신 우리 인간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도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쓰시려고 일부러 꺾는다고 믿었고, 나만 나를 더 특별히 아껴주시기를 바랬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이겨낼 의지를 애초에 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두렵고 섭섭했다.
그리고 내가 설날 심령기도 후에 큰 기쁨을 체험하기 전에도 지나치게 고통스러워 하지 않고 제법 잘 버틸 수 있었음도 기억했고, 수술 받은 후 교육을 받을 때 만났던 다른 유방암 환자들의 편안한 얼굴 표정을 보고 놀랐던 기억도 났다. 신기하게도 시간 차 없이 동시에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사람들 보다 훨씬 응석부리고 떼를 많이 썼기 때문에 하느님이 위로를 주셨던 것임을 알았다. 신앙체험이 없이도 고통을 잘 견디는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강한 의지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다는 니이체가 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적이 있다. 오래 전 일이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첫 부분에 여러 신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책을 읽은 후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도 유일신으로서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니이체가 엄청난 분량의 책을 써서 신이 죽었음을 주장했듯이 누군가 뛰어난 신학자가 ‘하나이시고 창주주이신 하느님’을 이성으로 증명하는 책을 써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온전한 자유의지를 주고 독립적인 이성과 감정을 주셨기에, 하느님을 인식하기 힘들 만큼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느님은 자신을 믿으라고 강요하면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는 로봇 같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으니까.
나는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은 후에, 내가 하는 기도가 정말로 우리를 만드신 분에게 하는 건지, 아니면 태초에 있었던 여러 신들 중의 한 분에게 하는 건지 궁금해 한 적이 있다. 내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니까 여러 신들 중에서 내가 상상한 신과 가장 흡사한 힘센 어떤 신이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했었다.
2월 25일에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하게 직접해주신 말씀을 들은 후에,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신임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준 것이다”라는 말은 나아가 “내가 인간들의 모든 것을 다 지었다”는 말씀과 같은 말이다.
기독교는 예수님만이 구세주이심을 믿는 종교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직접 전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으셨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 보다는 이해하기 쉽고 은총을 얻는 길도 훨씬 쉽게 열려 있다.
신이 만물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나 갈 수 있는 내세에 따로이 떨어져 사시는 분도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살다 죽으셨고, 다시 살아 나셔서, 우리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모르는 채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직접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에게 말씀도 해 주시고 사랑을 느끼게도 해 주시는 인격적인 신이다. 하느님은 우리들 각자의 바로 옆에 사람처럼 계시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말을 걸 수도 있고 떼를 쓸 수도 있고 모르는 체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나를 지으신 분으로서, 또 영혼의 아버지로서, 나를 늘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분명히 느꼈다.
하느님은 세상 끝날 때에나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실 분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와 힘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남은 내 인생 동안에도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굳세어졌다.
하루에 세 번씩 바치는 삼종기도문에 이런 말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토마스의 고백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서야 믿겠다고 했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어떤 제자들 보다 뜨거운 고백을 했답니다.
저는 언제나 의심 많은 토마스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고 옷자락을 만져보고도
자꾸 자꾸 만지고 확인하고 싶은
토마스보다 더 의심 많은 부족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저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사랑스런 눈길로
제 부족한 마음을 헤아리시고
당신을 만져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당신의 자비는 크기만 합니다.
의심 많은 저에게
말씀을 들려 주시고,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셔서
세상에 외치게 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당신의 은총을 기억할 때마다
고마움에 눈물지으며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신앙 고백 > 투병일기-2015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봉성체를 앞둔 환우들에게 (0) | 2015.05.30 |
---|---|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 / 최인호 작가 (0) | 2015.05.27 |
털끝만큼도 차질이 없다 (0) | 2015.05.27 |
촛불이 갑자기 (0) | 2015.05.27 |
성령 송가 (0) | 2015.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