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5년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 / 최인호 작가

김레지나 2015. 5. 27. 18:39

  3년 전 한참 고통스러웠을 때 저는 성모병원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는 성경책을 꺼내 들고 위로가 될 수 있는 한구절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펼쳤는데 눈에 들어온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말씀은 주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지상에 있는 우리들에게 남긴 ‘그리스도 최후의 유언(遺言)’입니다.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저는 주님의 육성을 들은 듯하여 순간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처럼 힘이 솟구쳤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저와 함께 계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 약속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라!’란 감탄사까지 사용하셨습니다. 보라! 보아라! 인호야. 절대로 무서워하지 마라. 내가, 이 예수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맹세하지 않느냐. 두고 보아라. 내 말에는 틀림이 없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내 말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5,18 참조)


 

  오래전에 이런 우화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이 죽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을 되돌아 볼 때 자신의 발자국 옆에 나란히 걸어간 발자국을 발견한 그 사람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저 발자국은 누구의 발자국인가요.”
  “내 발자국이란다.”
  그 사람은 어느 순간에는 주님의 발자국이 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헤아려보니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는 투덜거렸습니다.
  “어째서 주님은 제가 불행할 때는 도망치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그래서 발자국이 하나뿐이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주님은 저와 함께 나란히 걷고 계신 것일까요. 이 인생의 순례길에서 주님은 제 옆에서 동반자가 되어 우화의 내용처럼 때로는 함께 걷고, 때로는 업으며 동행하고 계신 것일까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옆에 ‘다가서서 나란히 걸어가셨던’(루카24,15 참조) 주님처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풍경은 너무나 생생해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한데 제가 가슴 아픈 것은 누군지 못 알아본 두 제자에게 일일이 성서를 설명을 해주시고 뜨겁게 감동을 주셨으면서도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루카 24,28) 보였다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도대체 어디로 더 멀리 가시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 늦은 시간에, 저녁밥도 못 먹은, 노숙자처럼. 만약 제자들이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주님을 붙들지 않았다면, 온종일 함께 걷던 그 사람이 주님인지 전혀 몰랐던 두 제자가 마침내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본 순간 엠마오고, 빵이고, 밤길이고 다 때려치우고 뜨거운 감동을 안고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눈 오는 날 숲가에 서서’란 절창의 시를 노래했습니다.
   “이 숲의 주인을 나는 알 것 같다 / 그러나 그 집은 마을에 있어 / 내가 멈춰 서서 자기 숲에 / 쌓이는 눈을 바라봄을 그는 모르리라 / ···(중략)··· /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 그러나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잠들기 전에 서둘러 가야할 먼 길을 떠나려 하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직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루카 24,16) 눈뜬 장님인 저를 찾아오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을 서두르신 것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처럼 부활하신 이후뿐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생은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자신은 저희들의 허덕이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멍에’처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가시나무로 만든 왕관을 머리에 쓴 최후의 모습’(요한 19,2 참조)처럼 가시밭길의 연속이셨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마구간에서 ‘포대기에 싸여 말구유’(루카 2,7)에 눕혀졌으며 곧바로 이집트로 피난 가서 난민생활을 했습니다. 고향사람들로부터는 ‘저 사람은 가난하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참조)라고 ‘지혜와 능력’을 의심받고 하찮은 목수 취급을 당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어 주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마르 6,31 참조)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마귀에 홀린 아이를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마태 17,17)고 꾸짖을 정도로 과로의 연속이셨습니다. 오죽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고 한탄하셨을까요.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에는 주님이 머리를 두고 주무시는 장면이 한군데 나옵니다. 그곳은 방도, 침대도 아니며 한적한 들판도 아닙니다. 조각배 안입니다. 배 안이라 해서 안락한 선실도 아니고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르 4,38) 그것도 ‘거센 바람이 일어 물결이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거의 가득 차게 된 배’ 안에서 깊은 잠을 주무십니다. 공포에 질린 제자들은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지 않습니까.”(마르4,38)라고 ‘성화’를 부리며 주님을 깨웁니다. 주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해져라.’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잠잠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십니다.

 

  이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최후의 유언으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남긴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 곳은 바로 ‘제 마음(心)’ 속임을.
  주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 가자.”(마르 4,35)
  호수 저편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한 유토피아, 즉 피안(彼岸)의 세계.저는 주님을 제 배에 모시고 호수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 갑니다. 어떤 때는 바람에 돛이 부러지고, 거센 파도가 배안까지 들이찹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 마음의 뱃고물에 머리를 기대고 편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주무시는데 제까짓 바람과 바다가 어찌 배를 집어삼킬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그만 ① 거센 바람을 보자, ② 무서운 생각이 들어,③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지르며 성화를 부립니다.

  거센 바람의 의심과 죽게 되었다는 맹목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여지없이 무너트리는 교활한 악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고요하고 잠잠해져라’하고 명령하신 것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의심과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는 제 믿음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주님은 제 마음의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아,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깨우지 않고 멍멍개야, 짖지 마라. 쉬잇! 꼬꼬닭아, 울지 마라. 쉿! 달빛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주는 이 밤. 잘 주무세요, 우리 주님! 하고 자장가를 부를 수 있도록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9) 저에게 굳은 믿음을 허락하소서. 아멘.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

 

                            최인호 베드로 작가 - 2012년 7월 29일, 8월 5일 서울교구 주보 말씀의 이삭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