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강요셉 신부님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듯이

김레지나 2015. 4. 15. 10:17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을까요? 답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시간에 그녀가 무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는 하필 그 시간에 주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일까요? 그 답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마리아는 사랑으로 주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을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그것은 아직 그녀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외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을 찾는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기준과 이성적인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으로는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소생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부활은 파스카의 은총입니다. 파스카는 건너감이기에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힘이며 하느님 자비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사랑을 당신의 사랑으로 건너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당신을 향한 애틋한 사랑으로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마리아!" 하고 부르시자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부족한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은 한계를 지닌 부족한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이 마리아로 하여금 주님의 무덤을 찾게 해 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의 사랑을 주고 계십니다.  
 
부활이 죽음의 승리인 것은 바로 사랑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단지 우리의 사랑의 한계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부족한 우리의 사랑도 사랑이신 주님에게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듯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말씀과 기도, 성체성사 안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받음으로 우리 역시 내가 머물러 있는 죄의 상처와 두려움을 넘어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새로움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따라 길을 나설 때입니다. 그분이 건너가신 길을 우리도 건너가는 것, 그것이 우리도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강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