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나해 대림 제3주간 토요일
<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복음: 루카 1,26-38
하느님 존재의 가장 큰 표징
독일 영화 ‘거룩한 소녀 마리아’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매우 엄격한 한 사제의 교리를 듣습니다.
거룩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희생을 하는 것이라고 배웁니다.
이 사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남자 친구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대중음악도 듣지 못하게 하며 마리아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거룩해지기만을 바랍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는 14살 소녀 마리아는
자신의 희생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막내 동생의 입을 열어주려 합니다.
마리아는 세상과 구별되기 위해 하는 이상한 행동들 때문에 학교에서는 왕따가 됩니다.
그리고 동생을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성녀가 되는 길이라 생각하여 결국 거식증이 걸립니다.
마리아는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끝까지 음식을 거부하다가
숨이 끊어질 때 어린 동생은 “마리아 누나 어디 있어?” 하며 처음으로 입을 엽니다.
신앙을 그렇게 강조했던 마리아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죽음으로써 말을 못하던 동생이
치유되었다고 말하며 마리아가 성녀가 될 때까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자신이 딸을 죽게 만든 것 같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는 끝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잘못된 신앙이 가져다주는 비극을 그리려 했습니다.
신앙은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의 어머니가 과연 큰 신앙을 가졌기에 딸을 순교자로 만든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딸이 죽어 막내가 말을 하게 된 것을 하나의 큰 표징으로 여겼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다른 표징들이 필요하도록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표징들을 부족하게 주셨을까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마태 16,1)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마태 16,4)
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악하고 절개 없는 것일까요?
왜 세상의 기적들을 쫓아다니는 일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이 다시 부활하시는 것을 보고도
믿지 않았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이들은 그 마음 자체에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표징이 자신들 앞에 있는데도 또 다른 허드레 표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 아하즈에게 표징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아하즈는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보다도 이방 나라의 도움에 의지하던
신앙이 없는 못된 왕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너무도 믿음이 없었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그러나 아하즈는 주님의 뜻을 거부합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이는 아하즈가 다른 이들보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표징을 보면
다시 하느님께 돌아와야 하는 것이 싫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삶이 거북해지고 힘들어지기 때문에 성경을 읽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엄청난 표징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 중에서도 또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큰 표징을 보여주셔야 나중에 딴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가장 큰 표징으로서 처녀
(구약성경에는 ‘젊은 여인’으로 나와 있지만 마태오는 ‘처녀’라고 바꾼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의 탄생 자체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큰 표징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완전히 알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던 그 십자가의 사랑만큼 큰 표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징인 그리스도를 보고도 믿지 않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한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엔 병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리고 없던 신체가 만들어지는 기적들이
다른 종교들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단전에 기를 모으면 몸이 몇 미터씩 떠서 그 상태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이 숨어있기에
그런 표징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누구도 일으킬 수 없는 표징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피조물인 우리 각자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시는 기적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의심하여 어머니가 저의 참 어머니임을 시험하기 위해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시는 희생들을 보려고 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시고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희생보다 더 큰 표징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믿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옥좌에 앉아계셨다면 믿기 훨씬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구유에 누워계시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것을 보고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얻고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는 참 하느님이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음을 믿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떤 표징을 주어도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존재의 가장 큰 표징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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