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절박함이 가난이다.

김레지나 2014. 12. 20. 21:05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14년 나해 대림 제3주간 화요일

 

<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

복음: 마태오 21,28-32

 

 

절박함이 가난이다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타(World Trade Center)가 붕괴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건물이 붕괴된 후 마지막 생존자가 있었습니다.

27시간 만에 구조된 지넬 거즈만(Genelle Guzman)이라는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64층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사고가 나자 13층까지 내려가던 중 큰 굉음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건물이 무너지며 함께 매몰된 것입니다.

건물더미에 깔린 그녀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시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하느님을 멀리하고 살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탓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제가 하느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 순간입니다. 무너진 틈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가까이 계셔주세요. 제 곁에 머물러 주세요.”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다시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기도합니다.

 

“하느님,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기적이 없이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기적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넬이 외쳤습니다.

 

“누구세요?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불을 비추고 있는데 보입니까?”

“안 보여요. 제 손이 보이나요?”

간신히 뻗은 손을 누군가 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누구세요?”

“걱정 마세요. 곧 구조 될 겁니다. 제 이름은 폴입니다.”

 

그녀가 구조되는 순간까지 폴은 말을 건네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 구조된 그녀는 인터뷰가 끝난 후 구조대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폴이라는 구조대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구조대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폴은 누구일까요?

 

[출처: 기멀전 커뮤니티, 절박한 순간의 기도]

 

 

처음 여자를 사귈 때는 이 여자가 함께만 있어만 준다면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을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살다보면 이것 좀 바뀌었으면 좋겠고 저것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됩니다.

 

처음에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것이 없지만

점점 더 다른 것을 바라게 되면서 사이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위험의 순간이라면 무엇만을 바라게 될까요?

바로 그분의 손뿐입니다.

죽음의 순간엔 생명만 구할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난이고 가난하면 절박하게 손을 내밀고 그 내미는 손은 오른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모든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도성’과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대비시킵니다.

도성은 거만스럽게 흥겨워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는 정도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도성을 치워버리고 벌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풀을 뜯는 양처럼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은 당신께서 보호하여 주셔서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살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겐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분을 맞이하고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누렸던 이들은

베들레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난하고 가련한 목동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이란 하느님을 바라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 것들을 바라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저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바라보게 될 때 물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때가 바로 가련하고 가난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 하나면 다른 것은 바랄 수 없는 상태, 그때 하느님은 손을 내미십니다.

이 상태가 바로 가난이고 그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물에 빠졌을 때는 생명만 구해주면 된다고 하지만

나중에 생명을 구해주면 보따리 찾아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하고 가련해져 있다가 부자가 되어버리는 예입니다.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이 바로 하느님인줄 알지만 사실은 금송아지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었다고 해도 마지막 날엔 하느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만을 바랍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통해 다른 것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 가난하고 가련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까?

 

구원을 진정 나의 것으로 하고 싶거든 하느님만 있으면 세상 어떤 것도

더 이 상 바랄 것이 없는 가련하고 가난한 처지가 되어야합니다.

 

성경에서 ‘광야’가 바로 그러한 처지인 것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 그리고 요한이 살던 광야는 바로 ‘물’만 있으면 감사한

그런 겸손한 곳입니다.

 

이들은 생명의 물을 마시고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물이 채워진 도시는 다른 많은 것이 더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만이 절실하여 하느님으로 능히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갈 수 있을 때야만

하느님은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