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사하면 깨끗해집니다
2015년 나해 사순 제3주일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복음: 요한 2,13-25
< 감사하면 깨끗해집니다 >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은 일본인이 꼭 필요한 민족이었음을 억지로라도 인식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들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고 과장해 조선의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만약 어떤 민족이 자긍심이 강하다면 약탈자들은 그 안에서 끊임없는 반란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51종의 책을 불사르고 금서로 정했습니다. 그 책들은 모두 조선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 총독부 수뇌들은 장장 16년에 걸쳐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해 내게 됩니다. 침략자들이 쓴 조선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때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었던 단어들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당쟁(黨爭)’이란 단어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권을 쟁탈하기 위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는데 조선에만 당쟁이라는 형태로 더 치열한 암투가 있었다고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요즘 사극 드라마에서 많이 사용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권력을 좋아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민족인 것처럼 만들어놓았습니다.
그 다음엔 ‘단군신화(檀君神話)’란 단어입니다. 고조선은 역사적으로 엄연히 존재했었고 많은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고조선을 한낱 단군과 사람이 된 동물과 있었던 신화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우리 뿌리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500년 장구한 조선 단일왕조 시대를 그저 ‘이조시대(李朝時代)’라 칭함으로써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의 왕국처럼 여겨지게 했습니다.
과연 이들이 노렸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열등감’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민족이니 일본이 들어와서 지배하는 것에 감사하라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초등 국사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조선인들은 모두 똑같이 제국의 신민이 되고 천황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세상은 평온하게 되었으며 산업은 개발되고 무역은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강탈을 위해 만든 철도에도, 전쟁준비를 위해 세운 공장들에도, 천황의 신민을 만들기 위해 세운 학교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투자했던 돈은 60억 정도였고 우리나라로부터 빼앗아간 것은 440억 엔에 달했습니다.
조선총독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발언으로 추정되는 이 말은 지금까지도 현실이 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 일본은 한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장담하건데 한국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식채널 e, 침략자가 쓴 역사]
이렇게 일본이 우리나라를 약탈하면서 썼던 방식은 사탄이 우리 자신들을 강점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하느님의 성전으로 하느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듭니다. 그 방법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집’임을 알아야합니다. 집은 스스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은 혼자서는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집이 있어 그 집에 개가 살면 개집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살면 사람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는 부자다’라고 할 때 그 집에는 ‘돈’이 주인으로 있는 것이고, 나는 ‘국회의원이다’라고 할 때는 그 집에 ‘명예’라는 것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돈이고 국회의원일 수 있습니까? 이런 이들은 돈이나 명예를 잃었을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살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세상 것을 주인으로 섬기며 자신을 세상 것들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사탄인 뱀은 우리를 약탈하기 위해 우리가 매우 모자란 인간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더 가지고 더 높아지도록 충동합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이나 성공, 돈이나 권력 등을 주인으로 삼으며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인으로 삼는 것이 곧 우상이 됨은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누구도 우리의 가치를 그만큼 높게 쳐 주지 않아 자존감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 대신 ‘돈’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자신을 채워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 주인이신 하느님은 그 집에 살 수 없게 되고 그런 집은 영원한 파멸 외에는 다른 심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우상숭배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그런 우상숭배자는 예루살렘 성전처럼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사탄이 우리 집을 더럽히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또한 정화하는 방식 또한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들이 가치 없는 존재인 것처럼 믿게 만들어서 세상 것들을 우리 집에 들여놓고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 세상 것들은 쓰레기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마치 자캐오가 예수님을 맞아들이고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섬기게 되는 이유는 진정으로 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세상 것을 주인으로 삼아 나를 들어 높이려는 노력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칭찬을 한 적도 없었고 또 부모님 볼 시간도 별로 없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뜯어봐도 부모님의 좋은 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쑥스럽게 아버지에게 다가가 “저는 아버지가 우리 집에 계시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라고 칭찬을 했는데, 돌아온 말은 “미친놈!”이었습니다. 학원에 데려다주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때문에 공부를 잘 하게 됐다고 말하니, “니 점수가 공부 잘 하는 점수니?”라며 잔소리가 이어졌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산더미처럼 밀려왔지만 그래도 숙제이니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찰하고 또 관찰하니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 때문에 가려져 있던 그분들의 희생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엄마, 오늘 예뻐 보여요!”라고 했더니, “정말이니?”라며 오랫동안 거울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 배가 넉넉하시네요.” “허허, 배가 만물의 근원이지.” 이렇게 아버지의 유머러스한 면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한 아이가 쓴 일기 내용입니다.
“난 엄마 아빠와 같이 산다. 너무 당연한가? 우리 같이 산 지 얼마 안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엄마 아빠는 오랫동안 같이 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돌아오셨다. 난 너무 기쁘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실 때, ‘엄마가 만든 음식 매일 먹으니까 기분 좋아요’라고 말했다. 엄마가 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아, 양패 때문에 그래’ 나도 양파 때문에 눈물이 났다.”
30 번의 칭찬이 끝나고 아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
[지식채널 e, 엄마가 울었다]
왜 부모님을 칭찬하면 나도 변하게 될까요? 칭찬은 고마움입니다. 부모님께 고맙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또한 부모님의 사랑받는 자녀님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사랑해 주지도 않는 사람에게서 고마운 것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안의 사탄을 제거하는데 ‘감사’만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감사(에우카리스티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드셨던 채찍을 우리 자신이 휘두를 수 있다면 그 채찍은 바로 ‘감사’가 됩니다. 감사가 나를 정화하고 나를 참 하느님의 성전으로 만듭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귀한 성전이어야 귀하신 분이 사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엔 힘들겠지만 꾸준한 감사의 노력으로 우리 성전이 참 주인님의 것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감사로 뱀을 발로 밟고 계시기 때문에 도둑의 소굴이 아닌 하느님의 첫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감사하면 깨끗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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