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향 / 박노해
부처가 위대한 건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 아니다
고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부처가 부처인 것은
회향(廻向)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세상을 바꿔냈기 때문이다
자기 시대 자기 나라
먹고 사는 민중의 생활 속으로
급변하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거부할 수 없는 봄기운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서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저 눈물나는 꽃들 꽃들 꽃들
그대
오늘은 오늘의 연꽃을 보여다오
- 시집 『겨울이 꽃핀다』(해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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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의 싯다르타는 결국 삶의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서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내 안에 지혜와 사랑과 행복은 물론 삶의 진리가 다 들어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생로병사의 번뇌와 고통 속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과 지혜와 사랑을 받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누리기 위해 태어난 것임을 5월의 보리수 아침 눈부신 햇살 속에서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을 크게 되돌려 세상을 바꿔낸’ 회향을 했던 것이다.
‘자기 시대 자기 나라 먹고 사는 민중의 생활 속으로’ 뿐만 아니라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모든 존귀한 생명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 ‘나’라는 존재는 ‘남’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듯, 나의 존재 없이 남이 있을 수 없다. 나의 존귀함을 통해 남을 봄으로써 비로소 타자로서의 남은 사라진다. 삼라만상이 바로 나와 다름없는 일체가 된다. 이것은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나아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아니 돌 속에는 처음부터 부처가 있었으며, 낮은 데로 흐르는 시냇물, 창호지를 오가는 바람마저도 부처님의 숨결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만해가 곧 나이고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 아니겠는가. 저 우뚝 솟은 산이며 그 산 속의 절집과 바위와 바위틈새와 열린 숨구멍들이 온통 적멸보궁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지난 주일 운주사 누운 부처를 세 번째 다시 찾았다. 하늘에서 도공이 내려와 천개의 불상을 짓다가 닭이 울어 하늘로 올라가는 바람에 미완으로 끝났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암반이 생각 이상으로 커서 그걸 깎아 세우다간 불상이 망가지기 때문에 포기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발쪽을 보면 밑에서 쪼아서 세우려다가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어쨌거나 이것이 일어나면 새 시대가 열린다는 전설도 있고 하여 그 앞에서 큰 숨을 한번 내뿜었다. 종교는 달라도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다르지 않다. 생명존중, 나눔, 사랑 이러한 가치가 종교의 다름을 이유로 서로 밀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인류가 존재하고 생명이 지켜지는 한 그것을 지키고 존중하는 일은 영원토록 가치 있는 일로 남을 것이다.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 여전히 ‘나’는 살아가지만 내가 딛고 선 바로 여기가 곧 온 세계와 다름없으며,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의 세계임을 깨닫고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저 눈물나는 꽃들 꽃들 꽃들’을 본다. 그대, 크게 회향하여 '오늘의 연꽃'을 보여주소서.
권순진
Heaven Sent - Frederic Dela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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