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5) 이상화의 덫약 15년 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일입니다. 저는 운전 중이었고 지인 한 명이 옆에 타고 있었습니다. 교차로에서 차를 멈추어야 했고, 무심코 저는 전조등의 밝기를 낮추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운전 관습은 정차 상태에서는 전조등의 밝기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마주 오는 운전자의 눈부심을 줄여주는 배려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지인이 전조등을 밝힌 상태로 두라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꼭 전조등을 끄더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밝기를 낮추면 왜 안 되느냐고 묻자 그는 그저, 미국에서는 그러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미국이니 미국의 관습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의미였다면 별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말투는 흡사 아이를 가르치는 어른의 말투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드문 때였다면 ‘본고장’에서는 그러나 보다 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운전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운전 경력은 제가 그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그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투는 상당히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상화
병적인 이상화는 세상 어지럽혀
세월호 사건은 극명히 대조되는
이상화의 두 얼굴 발견한 기회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항상 마음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상화의 늪에 빠질 것입니다
교차로에서 전조등을 끄는 게 틀립니까?
그의 확신 뒤에는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선진국’ 미국의 관습은 옳은 것이고 한국의 관습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가 저를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동차에 대해 자신이 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져보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만, 미국 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이 그에게 그런 착각을 심어주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이 일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현상 한 가지를 잘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매우 훌륭해 보이면, 혹은 아주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하고 부러워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지고, 그 사람과 닮고 싶어집니다.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그런 상식적인 존경과 부러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특정 대상을 우러르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에서는 ‘이상화’(理想化, idealization)라고 부릅니다. 이상화가 일어나면 그 대상이 된 사람에 대해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남들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이는 단점들도 보이지 않게 되고, 그 사람이 하는 것은 무조건 좋아 보이고, 옳아 보입니다. 병적인 이상화의 극단적인 예로는 사이비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교리나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만큼 허무맹랑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종교의 우두머리가 하는 짓은 더욱 가관입니다. 어떻게 그런 종교를 믿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건 상식의 잣대일 뿐, 신도들의 믿음은 확고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교주를 이상화 내지는 우상화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정신에 큰 이상이 생긴 것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들 모두가 겉으로 쉽게 드러날 만큼의 정신이상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실 이상화 자체는 병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정도에 따라,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따라 순기능을 가질 수도 있고 역기능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분석의 여러 학파 중 하나인 ‘자기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제대로 발달하려면 어렸을 때 아이의 마음속에서 건강한 이상화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가 이상화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 첫번째 대상은 당연히 부모입니다. 부모가 훌륭하고 멋져 보여서 이상화의 대상, 소위 ‘롤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이는 이상화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그 결과 아이의 마음속에는 건강한 자존감 또는 자기애가 생기지 못합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부모는 더 이상 이상화의 대상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님을 아이가 서서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아이의 마음이 그만큼 성장해서 자신만의 독립적인 가치관과 취향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므로, 자연스럽고도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제 아이는 새로운 대상을 이상화합니다. 선생님, 연예인, 운동선수, 예술가, 학자.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이상화의 대상이 됩니다. 아이는 그들을 닮고 싶어 합니다. 이상화의 대상이 꼭 구체적인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념, 가치, 철학.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상이 마음속에 생기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이상화는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성장의 동력으로서의 이상화의 역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 현대 사회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고,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유교의 이념에 맞게 살았습니다. 1970~80년대의 우리 사회에도 민주화라는 이념적 목표가 있었습니다. 후세에 그것이 어떻게 평가되든, 얼마 전까지 인간의 세상에는 그때그때 세상을 규정하는 이념이 있었고, 그에 따라 삶의 가치와 의미가 정해졌습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과거와 같은 뚜렷한 이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유가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주어진 정답이 없는 지금은, 혼자 힘으로 각자의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아니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라진 정답 대신, 우리는 마음속에 이상을 품습니다. 당위와 의무로 삶의 의미가 정해졌던 시기를 지나 이제 우리는 이상과 취향으로 삶의 의미를 만듭니다.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좋아서 우리는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아직 세상에는 당위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은 타인의 생각과 관점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늘 자신의 관점을 강요해서 남들을 피곤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세월호 침몰의 충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조가 엉망이었다는 정황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온갖 부정부패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회의가 마음을 뒤덮습니다. 이단으로 규정된 종교가 이 사건의 한 축을 이룬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욱 깊은 절망을 안겨줍니다. 인간의 이상화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무모한지를 목격하면서, 우리 마음은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와 비관으로까지 치닫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고 지금도 목숨을 걸고 수십 미터 바다 밑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의무 때문에 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그 참혹한 현장에서 무너져 내린 인간성을 다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도리라는 이상을 그들은 실천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이상화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이상화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만 병적인 이상화는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이상화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호 이야기를 다시 꺼냈지만, 이상화는 그렇게 큰일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화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아이는 부모를 이상화하고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를 이상화합니다. 늘 닮고 싶은 누군가가 있고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상화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이상화의 과정에서 객관적인 판단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연예인이 좋아지면, 그의 단점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보인다고 해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가수가 노래를 못해도, 배우가 연기를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다 멋있습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들먹이며 팬들은 그를 반(半)신격화합니다. 특별한 날, 그보다 훨씬 가난한 그의 팬들은 선물이 아니라 조공을 바칩니다. 물론 연예인을 좀 과할 정도로 좋아한다고 큰일 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연예인을 떠받드는 팬들과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떠받드는 신도들의 심리는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이상화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삶에 해악을 끼치는 이상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상화는 현실을 왜곡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단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단점을 지적받으면 화를 내고 공격합니다. 사람이든, 이념이든 내가 이상화하는 것은 물불 안 가리고 지키려 듭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자신들의 교주를 지키겠다고 국가와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단적인 예입니다. 그들만이 이상화의 늪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아이돌 팬 그룹은 다른 팬 그룹과 싸우고, 여당은 야당과 싸웁니다. 정치인들의 제 편 감싸기와 궤변을, 이권을 챙기려는 계산된 행동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계산에 능하다면, 세월호 국면에서도 제 편을 챙긴답시고 국민을 자극하는 망언을 쏟아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망언은, 자신들이 이상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공격을 견딜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진심 어린 분노의 표현입니다.
엘에이 폭동 때 한인타운이 공격받은 이유 이른바 선진국들이 여러 면에서 우리보다 우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을 이상화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배울 것이 많은 만큼, 그들에 대한 이상화는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이상화가 우리의 자기비하로 이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이상화는 시비를 가릴 수 없는 것에서 시비를 가려내고,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에서 우열을 가려냅니다. 이상화된 대상은 무조건 옳고 우월합니다. 그에 비교되는 대상은 무조건 틀리고 열등합니다. 그것이 이상화의 논리입니다. 선진국은 무조건 옳고 우월하고, 우리는 무조건 틀리고 열등합니다. 백인은 우월하고 유색인은 열등합니다. 연예인들은 영어 이름 짓기에 바쁘고 범죄자 출신의 백인들이 영어 강사가 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상화의 기전에 의해 우리는 백인을 우러르는 만큼이나 유색인들을 깔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동남아에 가서 추태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영악한 계산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의 망언처럼, 동남아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굳게 믿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엘에이 흑인 폭동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인 경찰이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 타운이 공격당했습니다. 경찰이 백인 거주 지역에 경계를 집중한 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한인과 흑인 사이의 서로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이상화는 세상을 백인과 유색인으로 나누고, 유색인들은 서로를 경멸합니다. 따져보면 백인이 공공의 적인데도 유색인들은 백인을 좋아하고 다른 유색인을 싫어합니다. 저의 지인이 한 말은 저에 대한 공격도 아니었고 우리나라에 대한 악감정이 실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평범한 마음이 아주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것이 이상화의 함정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자연스럽게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죄입니다. 항상 마음을 들여다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남에 대한 이상화의 늪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