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자”
최현순(데레사) 박사 | 교의신학 박사
언제부터인가 “신학”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하는 공부로 여겨졌고, 더욱이 “신학”이라는 말이 풍 기는 위압감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신학에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거나, 사실 그럴 필요 도 못 느끼게 하였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 선언은 우리의 이 ‘무덤덤’에 이의를 제기한다. “평신도들은 계시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치밀한 노력을 하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은혜를 얻어야 한다” (교회 헌장 35항) .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하는 치밀한 노력’, 이것을 하는 사람들을 ‘신학자’라고 부른다.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자신이 믿는 것을 지성으로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신학이고, 그래서 신학이란 다른 말로 ‘믿는 바를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신학이 가진 첫 번째 특징이 나타나는데, 신학은 바로 ‘신앙인’이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학이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 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신앙을 전제로 한다. 동시에 ‘신학을 한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앎이 하느님에 대한 참된 것일 때 본질적으로 신앙의 성장에 기여한다. 그래서 신앙은 신학을 가능케 하고 발전시키는 동시에 신학이 목표로 삼는, 다시 말해 신학의 모태와 같다.
신학의 또 다른 특징은 ‘삶과의 연관성’이다. 즉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신학이고, 그렇게 깨닫게 된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삶 안에서 다시 실현된다. 삶과 유리된 신학이란 그저 사변일 뿐이고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삶은 신학이 시작되는 곳이며 동시에 신학이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또 알게 되며 그로인해 삶을 더 풍요롭게 산다면 그는 이미 신학하는 사람이다. 삶은 신학이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모태인 것이다.
신앙과 삶이라는 신학의 두 모태는 신학자의 범주를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만이 신학자가 아니다, 성인성녀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 봉사를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이미 신학자이다. 물론 학문영역에서 하는 신학이 더 강도 높은 이성적 작업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와 삶 안에서 하는 신학이 ‘덜-발달된’ 신학, 혹은 신학하기 위한 단지 ‘준비단계’에 속한다는 생각은 아직 신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고, 어떤 신학자의 말을 빌자면 ‘미성숙한’ 생각이다. 하느님을 믿고 이해하려는 거기에서 이미 신학은 시작된다.
그런 신학함의 자세는 똑똑하다는 일부 사람에게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1베드 3,15)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인 구원의 희망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해가능한 언어’로 설명하라는 것을 의미하고, 이 요청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를 향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신도들이 “계시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치밀한 노력을 하라”고 요청할 때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바로 ‘신학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헨리 뉴만 추기경이 신앙인의 모범인 마리아를 또한 신학자의 모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하던” 바로 그 모습 때문이다. (루카 2,19.51).
수원교구 주보 14년 8월 24일자
'밭에 묻힌 보물 > 기억할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상의 아름다움⛅ (0) | 2014.09.26 |
---|---|
우물에 빠진 당나귀 (0) | 2014.09.24 |
마음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건 죄가 아닐까요 - 막말과 사이비 종교는 이상화 탓? (0) | 2014.05.26 |
☆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요? - 세월호 (0) | 2014.05.26 |
[스크랩] 회향 / 박노해 (0) | 2014.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