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승우 명서 베드로(평화방송 TV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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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말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요? 진도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웠던 울부짖음도 이젠 희미해졌습니다. 대다수 유가족이 참극의 현장을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온들 어찌 살아 있는 목숨이겠습니까. 눈을 돌리는 곳마다 자식을, 형제를, 부모를 앗아간 핏빛 바다일 것이고, 귓전에 울리는 소리마다 파도에 휩쓸린 사랑하는 이들의 비명일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한 달을 넘기면서 실종자 통계는 거의 사망자 통계로 바뀌었습니다. 300명이 넘는 죄 없는 생명을 하느님은 왜 저버리셨을까요? 주님은 대체 어디 계셨을까요? 우리의 절대자는 정말로 사랑의 신이 맞는 건가요? 답 없는 물음 앞에서 신앙은 여지없이 초라합니다.
“그분의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해답은 결국 성부와 성자로부터 얻어져야 하겠지요. 예수가 죽을 때 하느님도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겁니다. 아버지이시니까요. 부모의 마음이 차가운 바다에서 숨진 자녀들과 함께 있듯이 우리 하느님도 당신 자녀인 그들 곁에서 죽음의 고통을 나누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존경하는 어느 신부님이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기에 앞서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월호가 침몰한 날은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이틀 후 성금요일에 성부는 성자를 잃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자식을 십자가 위에서 여의었습니다. 부모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살이 패이고 뼈가 부서지는 아들의 아픔을 하느님도 고스란히 겪었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참혹한 괴로움을 아버지가 겪어낸 뒤에야 예수는 부활했습니다. 그리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부활 신앙이기 이전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절대자와 함께 이겨내는 극복의 종교가 아닌가 합니다.
악몽의 4월 16일, 다시 ‘그날’의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얼음 같은 물속에서 “엄마 사랑해”라고 문자를 보냈던 아이들 곁에, 임시직이라고 홀대받으면서도 자신의 구명대를 승객에게 건넸던 젊은이들 곁에, 기울어가는 배 안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걱정했을 어르신들 곁에 우리의 하느님이 틀림없이 계셨다고 굳게 믿습니다. 당신 품에 그들을 감싸 안고 한없이 눈물 흘리시며 잠시의 어둠이 지난 뒤 부활의 눈부신 빛을 향해 같이 길을 나섰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성자의 부활이 진실이듯이 희생자들의 거듭남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또한 오롯이 진실임이 분명하다고 거듭 마음에 새깁니다.
200만 가까운 시민이 전국의 분향소를 찾아 슬픔을 나누고, 성당마다 눈물의 연도가 넘쳐납니다. 온 나라가 애도의 물결입니다. 바꿔 생각하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거대한 사랑의 공동체가 생겨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극복의 열쇠라고 여깁니다.
그 간절한 기원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떠나간 이들과 함께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신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주님 품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연대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자비의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결코 멈춰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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