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라자로야, 어서 나와라" - 사순 제5주일 강론

김레지나 2014. 4. 23. 18:23

라자로야 어서 나와라 - 사순 제5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지난 한 주간은 봄 소식으로 가득한 봄날이었다. 초여름을 방불케하는 날 덕분에 너무 이른 여름이 오나 걱정했는데 이내 날이 추워져서 기껏 꽃망울을 실컷 터뜨린 벚꽃들이 그 자태를 뽐내기도 전에 많이 떨어지는 비운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강화는 이제 벚꽃들이 피기 시작하니 그나마 늦게라도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봄을 알리는 봄꽃들의 향연을 볼 때마다 겨우내내 얼었던 땅덩어리를 뚫고 나오는 새싹과 죽은 나무와 같았던 나무들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자연의 신비를 새삼 느낀다. 더불어서 죽음과 삶이 모두 하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도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생명과 죽음이 달려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우리에게 선포되는 복음도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생명과 구원의 빛의 방향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무지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앙의 빛을 주시는 예수님,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하느님 창조의 빛을 선사하시고 믿음을 찾게 해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오늘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시면서 이제는 단순히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시거나, 병자를 치유하시는 단계를 넘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희망을 선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선포된다.

 

하지만 오늘 라자로를 일으킨 이야기 예수의 모습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와 가장 신적인 면모가 조화롭게 잘 드러난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의 문제 앞에서 예수님께서도 가장 마음이 북받치는 슬픔과 고통을 느끼시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는 유독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그의 오빠인 라자로를 사랑하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요한 11, 5 참조).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곧바로 그를 위로하거나 치유하러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 뒤늦게 내려가신다. 그리고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 4)라는 뜻 모를 말씀을 하신다. 아마도 예수님은 라자로를 통하여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시기로 계획하신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라자로에게 내려갈 때 이미 그의 죽음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 집에 다다랐을 때 그의 여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는 한결같이 예수님께 북받치는 슬픔을 표현한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 21) 마르타는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 믿었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이 곁에 계셨다면 틀림없이 사랑하는 라자로를 치유해주실 거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넘어간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그저 슬픔과 황망함을 예수님께 표현하는 길 밖에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마르타에게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신다. 먼저 당신이 한 인간으로 사랑한 가족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을 표현하신다. 그분은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요한 11, 33). 그리고 복음서에 유일하게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 35)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한 인간이 죽음 앞에서 겪는 황망함과 고통을 예수님 역시 똑 같이 느끼시는 것이다. 더욱이 가장 사랑하던 이들의 고통에 당신 스스로 동참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면모로 자신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이 파견된 이유. 바로 하느님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당신의 모습 속에서 보여주고자 하신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1, 41-42)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시고, 그분의 섭리를 알고 계시기에 이미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희망을 알고 계셨다. 단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할 표징이 필요하셨다.

 

이윽고 예수님은 라자로를 불러 일으키신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33) 라자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까지 나는, 달리 말해 완전히 죽은 자로서 새롭게 일으켜진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주신다는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이었다. 유대인들은 경악했다. 죽은이가 되살아난다는 것처럼 더 놀라운 기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는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살면 더 이상 육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로마 8, 9-10) 인간의 육신은 언젠가 죽음과 함께 썩어 없어지겠지만, 하느님의 영 안에 사는 사람은 결코 육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하느님 안에서만 참된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결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존속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 그 자체를 말한다.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표징을 예수님은 이제 당신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신비로서 보여주신다. 우리는 비록 그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직접 체험해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신비 안에서 희망을 살아갈 수 있다.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생명의 희망이 무엇인지 미리 맛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수 많은 순간들 속에서 무덤에 비견되는 일들, 남들에 대한 미움과 질투, 분노와 원망 때문에 자신의 어두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괴로와하는 우리 자신들, 세상이 나를 버렸다는 좌절감과 경제적 빈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실망의 어두움 속에서 묻혀 자신에 갇혀 있는 무덤 체험을 수시로 할 수 있다. 때로는 내 교만과 위선 때문에, 때로는 내 죄악과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무덤에 갇혀 지내기도 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손길을 내미신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이리 나오너라"하고 손을 내미신다. 더 이상 그 어둠 속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더 무거운 삶의 그늘 속에서 슬픔과 좌절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우리를 이끌어내신다. 그분의 음성은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르신다. 잠시도 내 삶의 평화를 간직 할 수 없을 때에도, 내가 너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잘 풀린다고 하느님을 잊어 버릴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부드럽고 때로는 단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리 나오너라".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여전히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하느님의 생명과 희망에로 나오지 못하는 어두움을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세상 속에서 여전히 죄와 고통의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이란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고, 그분을 떠나서는 언제나 그늘진 무덤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두움이 늘 곁에 있음을 깨닫도록 해준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면서 내 안의 어두움과 슬픔의 무덤을 박차고 나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자. 우리 인생의 굴곡에도 하느님은 언제나 내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고 계심을 믿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게 될 것이다.

 

2014. 4. 6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강화 성당 뒷 길인 북문길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네요~주일이라 사람들이 봄을 만끽하기 위해 많이도 나왔습니다.

봄을 알리는 이 계절에 부활의 희망도 가져봅니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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