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게 갈망하여라 - 사순 제3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야곱의 우물가에서의 대화는 가히 선교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상종조차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을 복음의 진리로 이끌어내는 진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번쯤 누군가를 신앙으로 이끌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안다.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기 세계에 빠진 이에게 신앙을 권유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신앙의 길을 외면하는 모습 속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본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시다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된 채로 다윗왕권의 정통성을 서로 주장하면서 지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유다인들의 자긍심은 북쪽 지파들이 베텔과 단에 성소를 세우고 우상숭배에 빠진 현실을 비난하며 북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천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시면서 이 지역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신데에는 더 깊은 뜻이 있을 듯 싶다. 그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오는 모습 속에서 이미 다섯 번의 결혼 실패와 현실의 어려움들을 짊어지고 걸어오는 모습부터 보셨을테고, 그녀에게 물을 달라는 청 속에는 처음 말을 걸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의지가 보이신다. 물론 여인은 유다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데 선뜻 자신에게 말을 건 예수님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일으키신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 10). 사마리아 여인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에게 생수를 주려는 예수님께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깊은 야곱의 우물의 물을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의 애환을 건드리신다. 그녀의 고단한 삶과 실패한 인생의 아픔을 어루만지신다. 그리고 그 여인이 인생에서 찾아온 물이 주어온 갈증을 풀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 13). 예수님이 주시는 물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물이란 말 속에 이미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생을 목마르게 살아온 자신의 영혼을 이제는 마르지 않을 물로 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물을 달라는 열망을 일으키신 셈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깨달은 첫 번째 과정은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비밀을 알아낸 예언자라고 생각한 점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제까지 듣고 알았던 이야기들, 예배해야할 장소에 대한 민족적 갈등의 의미가 당신을 통해서 해체될 것임을 알리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 4, 24) 진정한 예배는 참된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인간 각자에게 심어주신 영의 움직임을 느낄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물론 진리와 영에 의해 살아오지 않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저 메시아는 남의 이야기요, 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이 찾고 있는 바로 샘솟는 은총의 물이 예수 자신임을 알리신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 25) 그 여인에게 신앙의 문은 열렸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아집과 편견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샘물을 만난 듯한 체험을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웃에게 달려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고백을 한다.
여기서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람을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힘은 인간의 재주나 능력이 아닌 하느님 그 자신이심을 밝힌다. 예수의 제자들은 애쓰지 않았지만 뿌려진 씨앗들로 수확을 거두게 될 때 단지 도구로서 쓰여지도록 자신들을 내어 주는 일만 남았다는 말이다. 가령 이웃이나 가까운 친구들을 성당으로 인도할 때 내 능력과 인품으로 사람을 얻으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좌절을 맛보거나 교만의 덫에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인도한 인도자들은 이제는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서 살아계시면서 영의 움직음을 일으키시고 그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몇일을 묵으면서 마침내 깨달은 것은 누구에게 들은 신앙, 혹은 누가 권유한 신앙에 의해 의무감처럼 지닌 신앙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험과 삶을 통해 깨달아진 신앙이 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 42) 이제는 사마리아 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직접 만난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 고백이 이루어진다.
믿음은 결코 남에 의해서, 남이 대신 갖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나를 신앙으로 인도해준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책임지겠다는 고백은 스스로 내는 결단이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남의 신앙을 내 신앙으로 편하게 살거나, 남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그저 사랑이라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쉬워졌다. 가톨릭 신자라면 냉담의 유혹과 체험을 한두번쯤은 해봤을듯 싶고, 신앙이란 것이 처음에는 절대적인 것 같다가도 막상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란 느낌도 들게 한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남이 일으켜준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일으켜진 삶의 기쁨과 희망, 영혼이 열망했던 영적 갈망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는 것이다. 남을 선교할 때에도 내 방식으로 상대에게 신앙을 강요하거나, 내 정당성을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주장하는 것은 보편적 신앙에 어긋난다. 최소한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자신이 먼저 복음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전제되어야 하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과 삶의 가치들을 토대로 대화를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픈 사람에게 성당에 나오면 낫는다는 식의 말이나, 하느님 떠나 살면 결국 지옥에 간다는 식의 다소 폭력적인 요청은 복음적인 선교가 아니다.
참된 선교는 자기 복음화에서 시작되어 이웃의 삶을 돌보고 공감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 치유하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참된 복음의 기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신앙으로 이끄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이웃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참된 길을 보여주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이런 복음이 아닐까 싶다.
2014. 4. 16.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525년경, 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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