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주님수난성지주일 강론

김레지나 2014. 4. 23. 18:23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주님수난성지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성주간(聖週間). 우리에게 늘 반복되는 한 주간의 시간이 이제 거룩한 한 주간이라고 불린다. 가톨릭 교회 전례력으로 늘 반복되지만 시간의 의미가 새롭게 되새겨지는 때이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신비를 준비하기 위한 40일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이 교회의 전례를 통해 분명하게 표현되는 때이기도 하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첫 번째 단추는 예수님이 때가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신 구원의 때를 아시고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의 마음과 군중들의 마음은 엇갈린다. 군중들은 오랫동안 기대했던 힘의 메시아, 다윗의 왕권을 다시 회복시켜줄 메시아를 기대했다. 이방인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줄 군주적 메시아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들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옷을 벗어 바닥에 깔며 예수님을 환호했다. 하지만 작은 나귀의 등에 앉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원의 길을 철저하게 홀로 가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드디어 기다렸던 왕권을 회복하면서 얻게될 놀라운 하느님의 능력을 기대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과월적 만찬을 할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약을 세워주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신비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는 앞으로 닥칠 영광에 대한 기대 뿐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제자들이 결국 뿔뿔이 흩어져 자신을 버릴 것임을. 그래서 마지막 만찬 후에 겟세마니 동산에 오르셨을 때 그나마 열심히 자신을 사랑했던 세 제자만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자신을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시지만, 제자들은 잠시도 예수님의 고통와 그분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지 못한다.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 40-41) 예수님은 자신이 걸어갈 수난의 길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도 잊지 않으신다. 하지만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 42)라는 기도는 잊지 않으신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진정 깨달아야 할 하느님의 어린양이자 종으로서의 수난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수난의 길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들이 모여있었다. 군중들은 이미 제왕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예수님은 당시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 곁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유대인의 사회지도층인 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는 체제에 대한 불만을 일으키고, 율법을 어기며, 오히려 그들을 독사의 족속, 회칠한 무덤이라고 몰아세우며, 그들의 교만과 위선을 무너뜨리려는 예수님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 실망한 군중들을 선동해서 예수를 없애버리고자 한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듯이 고난 받는 주님의 종처럼 끌려간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 5-6) 그분은 그야말로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신다.

 

예수님께 희망을 걸었던 제자들은 도망가고, 그나마 베드로는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반전 드라마를 위하여 예수의 뒤를 쫓지만 예수님의 무기력한 모습 속에서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알고 실망하며 그 자리를 떠난다.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전혜 예수님과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확고하게 배신 한 후 자신을 쳐다보는 예수님의 슬픈 눈을 쳐다보고 떠난다. 그는 예수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릴 것이란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슬피 울었다.

 

자신을 메시아로 받들던 군중들이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순간 예수님은 완전히 홀로 서신다.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빌라도 마저도 무시하고,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다. 무엇이 예수님을 그렇게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걷게 했던 것일까?

 

사실 예수님의 수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 속에는 나 자신의 모습도 담겨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겠다고 약속하며 살아온 나 자신도 가끔은 하느님이 내 뜻대로 이뤄주지 않으신다고, 아무리 기도해도 내가 원하는 축복을 주지 않으신다고 그분을 원망하며 그런 메시아는 내게 필요없다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얼마나 자주 외치는가? 인간 관계에서 나에게 도움이 될 때는 한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세속적인 잇권 다툼에 휘말리면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몰아세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군중들 속에서 오버랩 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손을 물로 씻으며 자신은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회피하는 빌라도의 비겁한 모습도, 죄를 짓고 용서를 청하기보다 자기 죄책감에 쌓여 결국 목을 매달아 자살한 유다의 모습 속에도, 철떡 같이 믿겠다고 약속하고도 자신의 관심과 멀어지거나, 생각이 달라져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려 했던 베드로의 모습 속에도,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걷지 못하고, 잠들어 깨어 있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 속에도 우리들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의 수난기는 결코 우리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하느님 사랑의 신비이다. 왜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밖에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으셨는지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라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믿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얻진 성주간이 그야말로 거룩한 한 주간이 되려면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채우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또 다시 겪게 될 일상의 평범한 일과들을 보내면서 한 주간을 지내고 문득 마주한 부활 대축일이 남들의 기쁨과 남들의 축제가 아니라 진정 내 영혼의 해방과 자유, 참된 평화과 기쁨, 희망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성주간의 의미를 되새기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평소에 잘 하지 않던 기도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손에 들지도 않았던 성경을 읽어보는 용기,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원망의 순간에도 표현하지 않고 인내해보는 용기, 미운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바쁜 일과 속에서도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잠시라도 그분의 수난 감실을 조배하거나, 조용히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분의 고통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용기.

 

우리들의 작은 용기들이 속세에 찌들어 살면서도 거룩함에로 초대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참된 부활에로 초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활은 분명히 예수님의 수난의 체험과 죽음으로 완성되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맛보려는 우리 자신들의 노력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군중들 처럼 우리도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성삼일 신비에 동참하면서도 그분이 침묵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죄를 또 다른 악과 죄로 이겨내시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악의 근원을 이겨내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한 주간이다.

 

2014. 4. 13.

성주간을 시작하며

 

 

 

 

프라 안젤리코, <제자들의 성찬>, 1441-42, 프레스코,
186x234cm, 산 마르코 미술관, 피렌체 (성화 설명: 주보 3면)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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