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부활, 내가 남을 위해 죽는 길 - 예수부활대축일 강론

김레지나 2014. 4. 23. 18:23

부활, 내가 남을 위해 죽는 길 - 예수부활대축일 강론

 

 

송용민 신부

 

 

올 해 부활 맞이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실을 완연하게 드러낸 진도 앞바다 세월호 여객선 침몰로 인하여 3백명이 넘는 희생자 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 금요일 교구의 선배 신부님의 뜻 밖의 선종소식까지 겹쳐서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부활맞이였다.

 

온 국민이 통탄해하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재앙을 방치한 무책임한 선원들과 선장, 그리고 그런 총체적 부실을 키운 항만시스템. 이를 보도하는 언론들의 작태, 정치인들의 몰상식한 행동과 인기에 영합하려는 전시 행정. 하나부터 열까지 한국사회가 풍요로운 경제성장 뒤에 숨겨둔 엄청난 부실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어떤 학자는 대한민국이 침몰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야말로 전 국민이 심리적 재난을 겪고 있는 끔찍한 현실 앞에서 그야말로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다.

 

한 순간에 자식을 잃은 수백명의 부모들, 그리고 제대로된 구조와 경과보고 조차도 받지 못하며 슬픔과 통곡, 분노로 탈진한 유가족들의 아픔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마지막 시신이라도 봐야할텐데 시신조차 구해내지 못하고 설령 구해낸다해도 구별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들이 발생할 것을 벌써부터 우려하고 있다.

 

과연 예수님의 부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온 교회가 함께 축하하며 기뻐하는 데 과연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기뻐해야할 일일까? 도대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 물 속에 잠긴 아까운 어린 희생자들에게 과연 부활은 설득력 있는 위로와 희망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이번 성주간은 그래서 여러모로 힘들었다. 본당신부로서 성삼일 전례를 준비하고 부활을 맞이하는 일도 그렇지만, 마음으로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정작 부활절이 되어서도 마음껏 기쁨을 강요할 수도 없는 슬픈 현실 속에서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하지만 참된 부활의 체험이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이번 부활의 깊은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잃은 제자들에게 놀랍고 두려운 사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다른 형태로 체험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등장에 경악하고, 두려움마저 느낀다. 하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경악할 일이지 기뻐할 일은 아닌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렐루야를 외치면서 부활을 축하하지만, 정작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화려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게 제자들과 그분을 사랑한 사람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체험된 사건이었다.

 

부활을 제대로 묵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는 데 익숙하다. 숨이 붙어 있는 지 여부를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보는 자연과학적 사유가 부활을 죽음 이후에 죽은 시체가 다시 일어나는 것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복음서와 교회가 전하는 부활의 깊은 체험은 그런 생물학적 죽음과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신앙의 신비를 말하고자 한다.

 

한 번 생각해보자. 내가 산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그리고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살다보면 살아도 산것 같지 않게 사는 삶이 있고, 죽어도 살아 있듯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죽음도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 없이 죽고, 다시 살아나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생의 깊이를 느끼기도 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삶과 죽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손에 맡겨진 생의 신비에 속한다. 그렇다면 내가 산다는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를 때 그 삶은 완전하고도 충만한 삶이 된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해도 하느님 없는 삶은 사실 그분 편에서 보면 죽은 인생과 다를바 없다.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결코 그들이 풀려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죽음을 가져오는 것들은 그래서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것들이다. 욕심, 명예, 탐욕, 이기심, 원한 등 사람을 죽이는 악의 힘들이다. 인간은 그런 탐욕적 가치들을 추구할 때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내가 더 소유하고, 더 올라가기 위해서 남들을 짓밟아야하고, 빼앗아야 하고, 속이고 가려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버둥댈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남에게 상처주고, 그들의 삶을 빼앗고, 삶의 희망마저 짓뭉개 버린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사람은 안다. 내가 그 미움을 참아내는 것이 너무 힘들면 그에게 보복하려고 하거나, 앙심을 품고 그를 말로 행동으로 죽이기를 서슴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 속엣 담겨진 부활 신앙은 이와 정 반대의 삶이다. 내가 죽어야 남을 부활시킬 수 있는 삶. 예수님은 죄 없는 분께서 인간의 악행과 죄들을 당신 십자가에 짊어지심으로써 당신이 죽지만, 그로써 인간의 모든 죄와 죽음의 권세를 꺽으시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부활의 희망으로 되살아난다. 그분의 죽음의 자리가 그래서 곧바로 부활의 자리가 된다. 부활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을 때 체험하는 잔잔한 평화와 기쁨이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면서 무고하게 희생된 수 많은 어린 영혼들의 죽음이 너무 원통하고 이해되지 않지만,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이 사회가 온갖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는 현실을 다시 생명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희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배를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나선 이들의 이기적 무책임과 이를 입맛대로 보도하고 이용하려는 기득권 세력들의 악행을 짊어지고 죽음을 받아들인 희생제물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음에로 몰아낸 이들 속에서 죽음의 힘을 본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에도 단 몇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승무원들과 용기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죽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을 전해주었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그들의 숭고한 죽음은 남을 위한 사랑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부활의 삶을 체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희생자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엄마 아바 진짜 사랑합니다."란 문구들은 어쩌면 그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면서 부모들을 속섞였던 많은 아픈 순간들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참된 부활의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죽음으로 이 사회는 다시 부활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 더 이상 사회의 이런 모순으로 인해 이 같은 대형참사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강한 시민의식을 불러 일으켜야 그들의 희생이 참된 부활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그 길을 걷게 될까?

 

신학자 칼 라너는 부활이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지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발적인 죽음을 하느님 안에서 이루는 사람은 참된 부활의 삶을 산다. 내가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대신에 내가 죽는 일이 있어도 남을 살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죽으려는 용기를 가질 때 부활이 시작된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좌절하고, 실망하는 내 삶의 무의미 속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그 실망을 통해 자신을 비울 때 부활의 은총은 주어진다. 내가 하기 싫은 일들, 죽기보다 싫은 일들, 일상의 무거운 과제들, 미운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일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꺼이 짊어짐으로써 나는 그 일로 죽지만, 남이 살아날 수 있다는 체험. 그것이 부활 체험이다. 삿대질 하면서 네 탓이요를 외치는 부부 사이에서, 잔소리와 반항으로 양극화된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서 내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자신 안에서 받아들이는 죽음을 통해서 내 배우자가, 내 아이와 부모님이 살아난다.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목숨을 내 걸고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살고 죽는 문제가 결코 세상의 폭력과 죄악의 위협이 아닌, 자발적인 죽음을 통해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희생의 가치를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부활은 결코 2천년전 예수님께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부활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신앙 자체가 곧 부활신앙이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삶 속에서 깨닫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진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이 부활시기에 그 기쁨을 조금이나마 만나도록 노력해보고 싶다.

 

2014. 4. 19.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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