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시대의 허와 실 - 부활 제2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부활축제를 8일간 보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복음서에서 만났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마지막 모습까지 붙잡고 싶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씻어주신 예수님, 모든 희망을 잃고 낙담하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구원 섭리를 일깨우시고 빵을 떼어주시며 가슴 뜨거운 희망을 심어주신 예수님,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모든 걸 잃고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 힘없이 살아가는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고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챙겨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유대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모여 살고 싶지만 길을 못찾고 헤매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평화를 선물해주시는 예수님.
제자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분은 화려하고 열광적인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조용하고 정제된, 기쁘지만 기쁘기만 할 수 없는 그런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다. 자신들의 모든 희망이 끝나고,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답답한 그들은 함께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들은 스승 예수와 함께 어깨를 펴고 다니며 이제 곧 하느님의 나라의 중책을 맡게 될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가며 의기양양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희망들이 다 무너졌을 때 그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서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삶을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을까?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신다. 방 문이 잠겨 있는데도 말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의 공간 속에 갇히지 않으시고, 공간을 넘어 사람들에게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 제자들은 놀랐지만, 스승 예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 20). 평화. 얼마나 그들이 바라던 말인가? 스승을 버리고 살겠다고 도주한 자책감과 희망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살길을 찾지 못해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신 예수님은 그들의 갇힌 마음의 벽을 허물어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숨을 쉴 수 없이 숨 죽이며 살던 제자들에게 이제 숨을 쉬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숨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처음 내쉰 창조의 영의 담겨진 성령을 불어넣어주신다. 살기 위해 버둥대는 숨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는 기쁨이 되는 숨을 쉬게 하신다.
제자들의 부활 체험은 그들이 시련과 고통 속에서 얻은 잔잔한 성령의 평화였고, 영 안에서 숨쉬는 기쁨이었다. 육신의 고통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악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런 악에 짓눌리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숨을 쉬는 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한 없이 용서해주시고, 기다려주셨고, 사랑해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를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체험한 것이다. 그들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그런 부활체험의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제자들이 변화된 자신의 기쁨을 토마스에게 말하며 "주님을 뵈었소"했지만, 토마스는 공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그 체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토마스의 불신앙이라고 이름 붙여진 복음서 이야기는 토마스가 정말로 믿음이 모자랐기 때문에, 혹은 그가 다른 제자들과 깨달음이 늦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토마스의 입장이라면 겪을 만한 일이었다. 사실 우리 자신이 토마스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에게 보여준 것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상처들이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 27)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상처를 보았다. 그 상처가 두려워 도망간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 상처까지도 보듬어 안아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 감싸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본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스승 예수님을 부르지 않고, 엎드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을 외친것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현실은 너무 잔혹하다. 이렇게 전 국민이 함께 아픔을 겪어본 대참사도 드물것이다. 이전에도 수많은 참사와 사고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은 총체적 부실의 희생이었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모의 희망이었고, 사회의 미래였던 젊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무관심과 무책임한 제도들. 관행처럼 엮어져 있는 사회적 부실이 예고된 인재임을 말해줄 때마다 국민들의 분노와 고통은 더 커져만간다. 사실 우리 사회가 저출산 시대에 접어들면서 아이들에 대한 애착과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커진 사회 속에서 아이들을 한꺼번에 졸지에 잃은 부모들의 마음은 마치 모든 희망을 잃고 낙담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 고통을 남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대부분의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이런 참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큰 공감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아픔은 그 아픔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하지만 꼭 경험해보지 않아도 감정이입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느끼는 능력을 '공감능력'이라고 한다.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고, 남의 슬픔을 같이 느껴주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살면서 가장 인간적인 공존능력에 속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우리 사회는 이런 공감능력을 잃어왔다. 삶의 가치들이 인간적인 정과 사랑보다는 물질과 돈이 우상이 되는 세상이 되면서부터이다. 자본주의가 급속히 몰려오면서 짧은 시간에 우리 사회가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통해 삶의 질은 급속히 높아졌지만, 이를 뒷받침 해줄 삶의 정신적, 도덕적 가치들은 동반 성장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잘 사는 것은 곧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고,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인 세상이 되어버렸다. 무한 경쟁시대에 우리는 불신의 시대를 살고 있고, 우리 아이들은 경쟁 속에서 공부하는 기계가 되거나, 집단에 속하지 못하면 죽는 왕따시대를 버텨야 헀다.
그래서 이번 세월호 참사 사건을 지켜보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의외가 아니다. 남들의 슬픔의 본질을 보지 못하거나, 남들의 희생의 가치를 상대화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하는 정치인들과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작태를 보면서 더 분노하는 국민들이 이해될 정도이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이입만이 아니다. 그 아픔의 실체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성적인 사리분별이 있을 때 그 고통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다. 이번 참사를 취재한 한 외국 언론기자는 두 가지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하나는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놀랍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아파하면서 자발적으로 자원봉사를 일사불란하게 하는 모습에 놀랐다는 것이다. 정작 행정적 책임을 맡고 사고에 대처해야할 행정당국은 우왕좌왕하는 데 자원봉사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알아서 자신들이 할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국민들의 마음을 위대하게 끌어가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엇박자 나는 현실을 너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토마스가 제자들의 부활체험에 공감하지 못한 것은 봐야 믿을 수 있다는 냉소적이고 냉철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제자들이 기쁘다고 해도 정작 자신이 기쁘지 않은 것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슬프지 않은데 억지로 모두가 슬퍼하니 함께 슬퍼하라는 말에 강요된 감정이라고 볼멘 소리를 하는 이들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고 하신다. 요즘 말로 바꾸면 "너는 꼭 직접 당해봐야 아냐? 그렇게 한 대 맞고 정신차리기 전에 미리 깨닫고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이다. 남의 자식이 죽어서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이라고,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라,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분노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 부활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한국사회가 이번 참사로 겪는 상처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 상처를 빨리 잊고 싶은 것은 분명히 희생자들의 부모들이나, 살아 남은 이들, 특히 학생들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일반인들 조차도 감당하기에 너무 큰 아픔을 사회가 보듬어 안아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이겨내기 힘든 심리적 상처들이기에 온 국민이 아이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크겠지만,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일반인들도 한꺼번에 물에 잠겨 구조의 손길조차 겪어보지 못하고 그렇게 숨을 거둔 이들의 마음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할아버지이자 할머니,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이 아니던가. 모두가 힘들고 아파하는 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다. 물 속에 잠겨 그렇게 허망하게 간 이들을 우리 사회에서 부활시켜야 하는 살아 남은 이들의 소명이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이 참사가 던져준 희생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다. 이제 곧 6.4 지방선거가 시작되고, 월드컵이라는 스포츠 축제가 시작되면 우리는 언제 슬펐는지 모를 정도로 이 슬픔을 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할 것이다. 사실 시간이 많은 것을 치유해주고, 망각의 은총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도 우린 안다. 일부 정치인들이나 이 사태의 책임자들은 국민들이 빨리 이 사건을 잊고 다시 "대한민국"을 연호할 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냄비근성의 한국인이라고 자조섞인 표현을 써가면서 또 다시 시간 속에 우리 희생자들을 물 속에 영원히 묻어둘 지도 모른다. 천안함 사건에서처럼 그렇게 4년이나 그 사건을 추모하고 기억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 사회를 바꾼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자들을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 그들이 살아 남은 이들에게 희망이되고,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동력이 되도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체험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보여주심으로써 부활을 깨닫게 해주셨다. 상처 없는, 죽음 없는 부활은 없다. 그래서 부활 체험은 잔잔하면서도 내적으로 충만한 사건이다. 세상의 악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아도 결국 그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 그것을 깨닫는 것이 곧 부활체험임을 내 삶 안에서도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
2014. 4. 27.
오랜만에 내리는 빗 속에서 슬픔을 보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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