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6) - 부활 제5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길거리를 걷다보면 가끔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참 인상 좋으십니다.'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대개 '도(道)를 아십니까?'를 묻는 경우가 많다. 도(道)를 안다는 것. 즉, 길을 아느냐는 물음이다. 그런데 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길을 물으면 내가 그 길을 알면 자신 있게 설명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도 망설이면서 잘 모른다고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말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들이 묻는 길은 좀 다른 길이다. 내가 열심히 걷고 있는 그 길이 정말로 내가 가야할 길 맞느냐는 물음일 수도 있고, 혹시 지금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가서는 안되는 길을 가느라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는 물음일 수도 있다. 우리가 분주하게 하루를 살면서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걷지만, 정작 그 목적지가 내 인생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도 길을 걷고 있다. 가끔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알듯 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분의 행보에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도 당연했을지 모른다. 알듯 모를듯한 예수님의 마음. 그래서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 5)라고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확실하다. 내가 바로 너희가 가야할 길이요, 내가 말하고 선포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의 진리요, 내가 짊어지고 걸어간 십자가의 삶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선포하신다. 그리고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가지 말씀하신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코 제자들을 겁주거나, 장차 다가올 일들을 예상하시고 제자들에게 가야할 길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참된 길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가 목말라 해야할 진리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작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를 진지하게 예수님은 묻고 계신 것이다.
길에서 길을 묻고 사는 우리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1베드 2, 4-5)라고 외친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쉽게 만나는 돌들이 때로는 걸림돌처럼 우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내 발에 쉽게 채여 굴러다니는 강한 힘과 인내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살제로 사람들의 발에 채이고, 쓸모 없는 것인양 무시 당하며 내버려졌지만, 그분은 든든한 반석 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바위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돌이 되신다. 살아 있는 돌이란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점점 살아서 마침내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베드 2, 7)라고 고백할 정도로 믿음의 반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런 반석 위에 든든한 믿음을 키울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그분은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1베드 2, 8)라고 확신에 차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은 우리 시대의 언어로 말한다면 어떤 길일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적나라게 드러낸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과 걸으려는 길, 그리고 걸어온 길이 얼마나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길이었는 지에 대한 자성을 불러일이키기에 충분했다. 과거부터 신뢰의 부재를 뼈아프게 느껴온 한국 사회이지만 이번 사건은 그런 우리 사회으 모순이 대형 참사를 통한 희생으로 이어졌다. 당장 자식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부모들의 마음이나,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는 확신 속에서 부적절하게 대응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분노가 어울어져 한 마디로 길을 잃고 표류하는 한국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분은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 사회에서 변두리에 밀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다고 치부된 이들을 향한 길을 먼저 선택하신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경건하고 열정적인 기득권자들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분은 어떤 계층을 상관없이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깨닫게 해주는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길은 남들이 가기 싫은 길이다. 아니, 가야하지만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이기적, 탐욕의 길에서 다른 길을 묻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이상적으로 들리고, 때로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가야할 길.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요구하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으신다. 마지막 순간에 이 잔을 거두어달라는 호소를 통해, 십자가에서는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냐는 절규를 통해 인간은 흔들리는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만, 결국에는 당신이 가야할 길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 그 자체이셨다.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지를 서로 말하고, 다투며 합리화할 때 예수님은 당대의 지도층을 향해 진리의 언어를 잊지 않으셨다. 참된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불의와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예언자적 소명으로 그들과 맞서신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줘야하는 살아 있는 진리임을 보여주신 셈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사해주신 생명의 길이기도 하다. 살아 있다는 것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그런 세상과는 다른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은 어떤 형태로든 독자적으로 생존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그 생명을 상호 간의 끊을 수 없는 유대관계 속에서 유지하고 성장시킨다. 나의 생명은 결코 남의 생명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결코 혼자 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 몸부림 치면 상대적으로 남이 죽고, 내가 남을 위해 나를 죽이면 남이 살게 되는 세상이다. 더불어 살지 않으면 죽는 세상. 그런데 세상은 자꾸 혼자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니 우리 사회가 함께 생명을 찬미하고 살아가야할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각자가 맞고 있던 좋은 몫을 결코 빼앗지 않았다. 사도들이 기도와 선포에 전념하기 위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공동체 성원을 위한 고유한 직무를 만들고 그들에게 그 일을 전담시킨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받은 본질적인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이들을 선택하여 그들 역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동반자로 초대하는 것이다. 교회가 오늘날 가야할 길은 그래서 명확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과 그분의 말씀의 진리를 선포하고, 더불어 사는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면서 자신이 맡은 고유한 직무와 직분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2014. 5. 18.
크레타 화파, <성령강림>,
목판에 에그 템페라,
1662년, 35x28.5cm,
산 조르조 데이 크레치 교회,
베네치아 (인천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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