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함께 있겠다는 약속 - 주님 승천대축일 강론

김레지나 2014. 9. 25. 19:51

함께 있겠다는 약속 - 주님승천대축일 강론

 

송용민 신부

 

 

6월의 첫 날. 4월과 5월의 잔인한 두 달 간의 심리적 재난을 겪고 맞은 6월의 뜨거움은 예수 성심의 열정 이상으로 열기가 느껴질 한 달의 시작을 알린다. 아마도 가장 우리가 견디기 힘들면서도 가장 듣고 싶었던, 아니 들려주고 싶었던 말씀을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의 가장 끝 구절에서 듣는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이 짧은 말씀 속에는 복음의 핵심이자,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하느님 구원의 외침과도 같이 들린다. 함께 있지 못해, 함께 지켜주지 못해서 전 국민이 안타까움을 느끼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 구원 사업을 지상에서 마치시고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장 확실한 약속을 하신다. 당신이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약속 말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렇게 홀연히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멍하니 쳐바보고 있을 때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이 그들에게 알린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 11). 제자들이 자신들을 떠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황망하게 있을 때 과연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심지어 베드로는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힘없이 잡혀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모두 도망쳤다. 베드로는 그분을 알지 못핟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런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들에게 한 위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다. 40일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보낸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어리석음 속에 감춰져 있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했고,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일깨워 주신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던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19-20)였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마음 속에 부어주신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신다.

 

제자들이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할 장소는 먼저 갈릴래야였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가난하고, 버림 받고, 병들고 지친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그 분의 구원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먼저 복음이 선포되어야 했다. 가진 자들, 충분히 누리는 자들, 기득권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제자들은 복음의 기쁨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먼저 파견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의 승천의 장소에서도 더러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마태오 복음서는 전한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파견될 때 그들에게는 여전히 거부당하고, 박해 당하고, 배척 당할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는 확실한 보증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당신의 지혜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에페 1, 18-19) 확신했다.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 그 하늘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허공이 아니었다. 하늘은 모든 종교적 삶의 근원적 체험을 일으켜주는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한 없이 자비롭고 무한하신 신의 영역이자 표징이었다.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을 한 구소련의 무신론자 우주비행사는 우주 밖에서 "보라, 너희들이 믿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어디에도 없다."를 외쳤다고 한다. 반면에 신을 믿던 미국의 우주비행사는 처음 우주의 광활함을 목격하고는 "이 광활한 우주를 섭리하시는 영광스러우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실지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하늘은 분명히 하느님의 영역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자주 하늘을 쳐다보는 지 생각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하늘의 날씨를 보려 할 때, 세상 살이가 너무 원망스러울 때  하늘을 본다. 울고 싶지만 울 수 없어 눈물을 삼켜야 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하늘을 본다. 어쩌면 우리네 인간은 하늘을 향해 우리의 맺힌 한을 풀어주실, 모든 원망과 한탄을 들으주실 하느님을 찾는 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이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그런 높고 넓은 하느님의 마음과 같아지셨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영역에 이르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영광스런 주님이 되셨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분이 하늘에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성하시며, 마침대 약속대로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면서 마지막 때에 재림하실 분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사회적 안전망의 상실과 총체적 부실의 사회적 모순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의해 파견된 제자들처럼 우리 스스로가 먼저 이 절망의 구렁텅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는 그 약속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와 믿음의 보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파견된 갈릴래아, 바로 희망이 무너지고,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으로 우리 역시 파견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떠 받들고 있는 힘이란 것을 잊지 않도록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자 과제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우리가 세상 살이에서 땅만 쳐다보며 살던 삶 속에서 하늘을 올려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도 세상이 우리에게 채줘줄 수 없는 것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영적인 삶의 가치들이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나의 삶의 영역에서 회복될 수 있는 날들을 기대해본다.

 

2014. 6. 1.

예수성심성월 첫 날에

 

 

 

 

 2014년 6월 1일    주님 승천 대축일
라불라 복음서, <예수승천>, 586년경, 필사본, 27×34㎝,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피렌체 (성화 설명: 주보 3면)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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