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스크랩] 주일미사 참례에 대한 단상

김레지나 2014. 3. 30. 04:45

주일 미사 참례에 대한 단상

 

 

송용민 신

 

 

지난 24일 시작된 춘계주교회의에서 그 동안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와 이에 따른 고해성사의 원칙에 대한 새로운 지침이 나왔다. 현실적인 신자들의 어려움과 이에 대한 교회의 유연한 태도가 엿보이는 결정이라고 본다.

 

주일의 의무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현실의 교회를 들여다보면 금방 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 주일미사 참례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고 최근 통계에 따르면 22%까지 떨어지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이런 현실은 주일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신자들의 무관심도 한 몫을 차지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주일미사에 참여하기 힘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고해성사의 의무를 지우고, 이를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냉담으로 이어지는 고질적인 우리 교회의 모습에 대한 재성찰이기도 하다.

 

본당 사제로 살면서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례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들이 미사에 참석하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체의 힘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사제의 말씀의 힘과 미사 중 강론을 통해서 전달되는 메시지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부득이하게 주일 미사에 빠질 수 밖에 없던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교회가 분명하게 정리한 것은 직업상, 신체적, 환경적 요인들로 인해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고, 하느님과의 인연을 끊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한 복음적인 결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일각에서 우려하듯 부득이한 경우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경우까지 포함하는 것인지에 대한 신자들의 구체적인 규정 자체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주일 미사에 빠지면 자동으로 고해성사를 봐야하고, 그래야 성체를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해온 관행들은 이번 기회에 사목적으로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사실 가톨릭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성체성사와 고해성사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성체를 모실 자격을 고해성사로 제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신자들은 많이 받아왔다. 고해성사가 부담스러운 대부분의 신자들의 입장에서 주일미사에 빠지면 성체를 모시는 것이 죄스러울 수 있다는 의식 때문에 정작 고해성사의 용서체험의 은총은 사라지고 성체를 모실 자격을 부여하는 약식 재판과 같은 형태로 고해성사가 치부되어 왔음을 일선 사목자들은 공감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은혜로운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부담스런 일이 되었고, 부활과 성탄때 겨우 판공성사라는 이름으로 고해소를 억지로 찾거나 마지못해 고해소에 들어와도 참된 통회와 죄의 용서의 체험보다는 의무를 채웠다는 안도감이 신자들에게는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사실 신앙은 어떤 의무감과 책임감에서부터도 아니고,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심리적 위안도 아니다. 신앙은 그야말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느님을 향하여 결단하는, 그래서 그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만남을 교회 안에서 체험하기 위한 깊이를 간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신앙의 가치가 세속화와 종교의 시장화라는 두 가지 흐름 때문에 신자들은 갈수록 신앙의 본질과는 무관한 삶을 살며, 설령 오랜 신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적 기준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욕망의 기준을 교회에 맞춰 살려고 하는 자기중심적 신앙관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가 참된 진리와 정의를 말하면 신자들의 거부감이 많아질 것을 두려워 세속적인 관심에 편승해서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하거나, 공공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사회정의나 생명문화의 보존과 같은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일각에서 지나친 개인의 축복논리로 신앙을 사유화 하는 풍조에 대하여 교회가 쓴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야하는 불편함도 없지 않다.

 

중요한 점은 주일미사의 참석이나 판공성사의 의무와 같은 것들이 신자들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최소한 삶의 지침과도 같은 것이어야지 그것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가치관이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영적인 갈망을 더 갖기 마련이다. 오늘날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종교들이 보여주는 가치들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삶과 죽음의 문제와 씨름하게 되어 있고,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심리적, 사회학적 도구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단순히 심리적 안식처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눈을 갖게 해주는 인도자로서 신자들에게 길을 보여준다면 오늘날의 신앙의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4. 4. 28.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