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8월호 - 문지방 위의 신앙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 다시 생각해볼 때.
송용민 신부
이상과 현실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 우리가 겪는 삶의 고뇌 역시 자신의 현실과 꿈꾸는 이상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생긴다.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생기는 이 모순과 이에 따른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자기 방어 기재를 동원하여 이를 극복하거나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신앙생활에서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크게 느끼는 평신도들의 어려움 이상으로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늘어가고 있다. 과거 가부장적 제도의 교회에서는 사제직의 소명을 받은 성직자들이 스스로 그 품위를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사제적 권위를 평신도로부터 당연하게 인정받았다. 그래서 축성된 사제들을 함부로 하거나 그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체의 행위들은 ‘독성죄’란 이름으로 교회에서 단죄되곤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만 해도 사제들이 평신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교회의 주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소명의식과 확고한 교회 정신 속에서 평신도들을 사목하는 것이 용이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인격적인 면모보다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제직을 받은 사제들에 대한 존경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표현했고, 설령 사제들의 인간적인 실수나 결함이 있더라도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래전에 어떤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자주 상처를 주고 독단적인 사목을 하다보니 신자들이 사제관 앞에 모여서 촛불을 켜들고 묵주기도를 바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과거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상에는 늘 하느님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사목에 열정을 쏟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착한 목자’로서의 사제의 모습이 빠지지 않았다.
세상은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사제직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눈도 달라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의 새로운 비전으로 ‘사목’을 뽑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를 선언한 이후 가부장적 태도로 사목을 하는 사제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평신도들의 위상과 교회 안에서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과거 사제들이 가졌던 일방적인 권위의 모순에 대해서 민주적인 절차와 소통을 원하는 평신도들의 요구가 커졌다. 여전히 사제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며 순종의 미덕을 잘 지키는 열심한(?) 신자들도 많지만, 평신도들 각자의 기준에서 사제답지 못한 사제들을 대하는 태도는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사제직의 본질이나 전통적인 사제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여전히 평신도들은 이태석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이나 김수환 추기경님과 같은 겸손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사제들을 원한다. 하지만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상은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요즘은 기도를 많이 하는 사제들이 사목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당 공동체를 운영하는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인격적 매력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도 잘하고, 유머 감각도 좀 있고, 무엇보다 요즘 대세인 꽃미남 신부면 금상첨화다.
사실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사제들이 평소에 상대하는 상당수가 여성들이다. 남성들은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 사제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인생 이야기와 술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는 이들이 많고, 여성들은 자신들과 수다도 떨고,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겨주는 사제를 원하기도 한다. 간혹 술을 잘 못하는 사제들은 이른바 ‘밤 사목’에 어려움을 느끼고, 여성들을 편하게 대하는 것이 어려운 사제들은 함께 밥 한 끼 먹는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행여 호감이라도 가는 여성 신자가 생기면 질투의 불꽃을 내뿜는 다른 자매들의 눈치를 보며 마음의 선을 긋는 일도 불편하게 여겨질 수 있다.
오늘날 본당 사제들은 평신도들과의 관계에서 두 갈래의 사제상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것이 역력하다. 한편으로는 미사와 성사집전에 충실하고, 기도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전통적인 사제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본당 공동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며 평신도들이 지닌 은사를 잘 관리하고 조화롭게 만들어가며 공동체 리더십을 발휘할 줄 아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사제상 사이에서 고뇌한다. 사제들의 사목적 역량이 그만큼 따라가지도 못할뿐더러 사제들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가치관에 따라 모든 신자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제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오랫동안 양성하면서 느낀 점은 대부분 신학생 때 보인 인간적인 결함과 단점들이 사제가 된 이후에도 별로 변하지 않고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사제들이 수품 후에 대단한 인격적 성숙과 교회 정신으로 무장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은총이 사제들의 인격적인 본성까지 바꾸지는 않으신다. 예수님의 12제자가 그러했듯이 하느님은 본래 사제 각자가 지닌 고유한 은사를 통하여 교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다. 그래서 신학생 때 걱정했던 문제들은 특별한 회심체험이 없는 한 사제가 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의 성소 식별을 할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분명히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음에도 그 식별에 대한 결단이 양성자들 사이에서 일치하지 않거나 유보되는 경우에는 수품 후 사제들은 언젠가는 같은 문제를 신자들 사이에서 일으킨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학생들 스스로 사제직에 대한 진지한 성소식별을 스스로 유보해서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하기 보다는 사제가 된 이후에 오히려 그 문제를 감추려고 하다보면 왜곡된 사제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유학생활 때에 독일 신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미래 사제상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함께 신학원 생활을 했던 독일 신학생들 가운데에는 사제직에 가까워질수록 진지하게 자신의 성소에 대해 고민하고, 미래 자신의 사제적 삶이 행복해질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면 길을 과감하게 바꾸는 결단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들 가운데 유럽 교회의 사제 성소자가 급감하면서 성직자들의 숫자도 줄고 그들이 맡아야하는 교회 공동체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행복한 사제직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이 열악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한 몫을 했다. 유럽 교회는 사제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 열정의 결과가 그렇게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랜 교회의 잘못된 권위 때문에 평신도들이 교회에 대한 가진 실망감이나 혐오감뿐만 아니라 사제들을 단순히 교회의 기능적 직무자로 바라보는 경향 때문에 사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사제직을 살 수 있는 여건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사제들은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교회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교회에 살기 때문에 그들이 사제적 열정과 헌신을 갖고 신자들과 소통하며 사목을 하는 한 행복한 사제직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여전히 많다. 소탈하고 열정적이며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제들에게는 간이라도 빼줄 정도로 헌신적인 평신도들도 여전히 많다. 제단에서 조금 아픈 티를 내면 이내 사제관 앞에 약과 몸에 좋다는 것들이 쌓이는 교회이다. 신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사제라면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고, 소리 없이 좋은 선물을 전해주고 사라지는 신자들도 많다.
물론 신자들 가운데에는 그저 사제를 자신의 술친구로 삼거나, 자신의 교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사제들에게 물량 공세를 펴는 이들도 있다. 자매들 가운데에는 사제들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잃은 애정을 채우려는 대체심리를 가진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평신도들이 사제들에게 바라는 사제상보다는 사제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매력과 관심을 세속적인 행복과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더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직의 본질이 변한 것은 없겠지만, 이제는 평신도들이 지켜주는 사제직보다는 사제들 스스로가 자기의 사제직을 지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게 되었다. 사제직을 떠난 어떤 선배가 사제수품 후 남긴 말이 생각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내가 폐를 끼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즘은 내 사제적 삶이 평신도들을 위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충실한 것인지 자문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천 신학교 대성당 정문에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
이 세상에 빛이 되신 주님을 따라 나서는 길이 험하고 멀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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