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 연중 제21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루카 13, 23)
예수님께 당돌하게 던지 이 질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대인의 율법 조항들과 삶의 지침들을 지키는 것이 까다롭고 힘들어서 그런 것들을 다 지키는 사람이 얼마 없을테니 구원 받을 사람이 적겠지요? 라는 물음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살면서 던지는 질문들 가운데 긍정형 질문이 있는가하면 부정형 질문들이 있기 미련이다. "물건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요?"라는 물음과 "이제 물건이 얼마 안 남았지요?"라는 형태의 물음이 언제나 상존하기 마련이다.
유대인이 예수님께 구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듯이 요즘 신자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란 질문을 던지면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개신교 신자들은 대부분 교육 받은 대로 “네, 저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응답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와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는 믿음을 이른바 ‘의화’란 바오로 사도의 용어로 이해한다.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관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다시 회복된다는 뜻의 ‘의롭게 됨’을 구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의로움을 인간이 입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믿음의 힘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인 셈이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같은 질문을 받으면 “글쎄요, 제가 구원 받을지 않을지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혹은 “구원은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께 받을 거 아닌가요?” 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가톨릭 신앙에서는 그냥 믿는다는 고백 만으로가 아니라 그 믿음에 따른 행실과 실천까지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듯 교육된 탓이다. 하지만 모든 가톨릭 신자들도 세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물로 씻기고 축성성유로 도유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삶의 회심이 이루어졌기에 하느님의 구원이 믿음 안에서 분명히 주어진 것이다. 단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 은총의 삶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하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구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만 그 구원 받은 자 답게 살아가야 하는 믿음의 실천이 가톨릭 신앙에서는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문이다.
이유가 어째든 구원은 분명히 하느님의 영역이지 인간의 기준으로 받고 못받고를 판단할 영역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좁은 문’(루카 13, 22-30)에 비유하신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조건을 좁게 만드셨다는 의미에서 좁은 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기준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좁게 해석해서 생기는 좁은 문을 뜻한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어떤 공로나 노력을 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조건 없이 무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우리의 공로가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에 비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수도 있다. 단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 구원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보다 더 크게 만들거나, 그분 없는 삶을 꿈꾸거나 그분께로 향하는 문을 좁게 만들어 하느님 사랑을 인간의 기준으로 제약하려는 유혹을 받곤 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제한된 사람들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사람들의 구원을 제약하는 하느님의 옹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사이비 교회들이 인간의 구원을 특정한 숫자로 제약해서 그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구원의 조건을 자신들의 교회 구성원에게만 여는 미혹을 일으키는 문제도 없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 29-30)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이 인간의 기준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단지 그런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한 이들에게 구원은 그저 공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고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구원 받았는데 왜 하느님은 시련과 고통을 주시냐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 자녀답게 살도록 훈육하신다는 말씀도 전해준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히브 7. 7-12)
믿음에는 하나의 시험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한 훈육의 길일 수도 있다. 조금 시련이 닥치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모습은 신자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가톨릭교회에서도 세례 성사가 구원의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이지 필수조건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세례성사가 자동으로 구원을 약속해주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16항에서는 분명히 밝힌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그분의 생명과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된 삶의 기쁨을 드러내는 참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구원 받은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물을 일이다.
2013. 8. 25.
고갱의 역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란 제목의 작품이네요.
인간의 에덴동산에서의 죄악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많은 과정들을 작품 속에 담았다고 하네요.
참된 구원을 목말라한 고갱의 말년의 삶과 묵상이 담긴 작품... 요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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