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천국 연옥 지옥, 세상의 종말과 완성

김레지나 2012. 5. 5. 21:30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4. 세상 속 사람들
천국 연옥 지옥, 세상의 종말과 완성

몇 해 전에 본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영화 한 장면이 떠 오른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환경오염으로 파괴되어가는 지 구에 경고장을 보내는데, 내용인즉 아름다운 지구를 무자비하 게 파멸시키는 인류 종족을 없애는 것이 이들이 지구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소 황당한 설정이지만, 오늘날 인류가 저 지른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로 지구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위기 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편 일리가 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룬 서구 문명은 인간이 겪는 실존 적 불안 속에서 과학기술 발전이 낳은 자연 파괴로 인류 종말 의 위험을 직시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자연재앙이 쉴 새 없 이 발생하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사상 유래 없는 지진과 해 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일도 발생했다. 인간이 가진 기술 진보의 총화라고 여겼던 핵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인류는 역사의 중대한 순간마다 인류 종말이라는 단어와 마 주해 왔다. 초기교회 신자들은 곧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 의 재림을 세상 종말로 여겨 참혹한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잃 지 않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다. 중세 신비사상가들은 세상 이 선과 악의 투쟁 속에서 마침내 선이 승리하게 될 영광의 종 말을 대망했고, 난세에는 절세의 예언자들이 나타나 세상 종말 의 표징을 보여주고 다가올 종말을 예비하라고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개신교 집단이 인류 종말의 표지인 휴 거와 천년왕국설을 내세워 사회적 혼란을 가져온 적도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2천 밀레니엄 버그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파티마의 제3의 비밀에 이어, 지구와 혜성의 충돌과 외계인들 의 침공에 이르기까지 인류 종말에 대한 담론을 끊임없이 펼 쳐 왔다. 과연 이러한 세상 종말의 시나리오를 신앙인들은 어떻게 받 아들여야 할까? 신앙인에게 세상 종말은 우리가 상상하는 공 포스럽고 두려운 사건이 아니다. 비록 요한묵시록의 종말론적 표상들과 실제로 세상 종말적 징후와 관련된 대재앙의 서막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인류 종말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킬 수는 있 겠지만, 그런 것들은 신앙인들의 언어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종말은 하나의 완성이다. 창조주 하느 님께서 시작하신 역사를 마침내 당신이 완성하시리라는 희망 의 사건이다. 그래서 신학도 '종말론'이란 부정적 단어보다는 '완세론完世論'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신앙인에게 종말은 구원이요 시간의 완성이며 창조의 궁극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사건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각자에게 세상의 파국적 종말 사건은 신앙의 눈으 로 보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 나의 죽음과 더불어 세상의 종말 을 맞는 셈이기 때문이다. 종말적 표상들이 단지 개인의 생명 을 위협하는 불안 요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 차피 한 번은 맞이해야 할 죽음과 더불어 세상의 종말을 겪게 될 것이다. 죽음이란 사건이 신앙인에게는 시간의 마침이요 완성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역사 속에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어 "하 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2베드 3,8) 같으신 하느님의 영 원함에로 넘어가는 관문일 뿐이다. 그래서 언제 세상 종말이 올 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죽하면 예수님도 재난이 시작되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 36)고 하시지 않았는가. 중요한 점은 그때가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완성하실 시간, 곧 하느님 영 광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우리 삶의 시간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비록 지금의 현실이 고난과 두려움 으로 휩싸여 있더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희망과 평화의 시간을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을 이른바 '종말론적 선취先取'라고 한다. 종말 에서야 이루어질 사건을 '지금 여기서'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은 총 체험인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기쁨과 평화의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살 고 있지 않은 것처럼 종말에 체험될 사건을 미리 맛보는 것이 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체험이다. 세상을 완성하실 하느 님께 대한 신뢰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 리 안에 심어 주신 희망 속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루신 업적,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그리고 '다 이루 어졌다."(요한 19,300라는 말씀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세상 종말은 언젠가 이루어질 우리의 희망이다.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장)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에덴동 산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시려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선물은 내세에 받게 될, 그래서 현실에서는 오직 영혼 구원 에만 힘써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류가 당면한 생태계 위기에 맞서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노력 속에서 세상을 완성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과 발을 빌 어 세상을 완성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어 온 인류가 세 상 속에서 에덴동산을 함께 꿈꾸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선물을 찾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신앙인이라면 종말을 두려워하기보 다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