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삶, 뭔가 달라야 하나

김레지나 2012. 4. 16. 21:49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4. 세상 속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삶, 뭔가 달라야 하나?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의 윤리의식구조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비신자들과 비교했을 때 윤리의식이 더 분명하다거나 그다지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회에서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일반 윤리 뿐만 아니라 생명윤리 분야에서도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 교회가 정작 신자들의 윤리 생활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더불어 '삶 따로 신앙 따로'라는 가톨릭 신앙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재확인하는 것 같아 씁씁함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은 가톨릭 신앙이 지나치게 '의무'와 '계명'에 갇혀 왔다는 자성자성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구원영생을 체험하는 개신교의 단순한 신앙 논리와 비교했을 때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배울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법과 교회의 사회적 - 윤리적 가르침, 때로 교 황님과 주교님의 사목 교서와 지침들도 따라야 하는 등 '아는 (知) 신앙'에 매이다 보니 신앙은 짐스럽고 부담스러운 또 다른 십자가가 되어버렸다. 하느님을 알아 가고 예수님을 통해 그분 사랑에 깊이 빠져 드는 신앙에 매료되기도 전에 너무??

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가톨릭 신앙은 뭘 알아야 면장을 하는 그런 신앙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청년들과 성인 신자들 사이에 새로운 영성운동을 중 심으로 '의무적 교회 신앙'에서 '신바람 나는 신앙'으로 바꿔 보자는 요청이 힘을 얻고 있다. 지성적 신앙에 치중했던 가톨릭교회가 이제는 '신앙의 맛과 체럼'을 중시하며 평형감각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래야 가톨릭 신자들 이 교회의 계명을 의무나 무거운 십자가가 아닌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교회도 신자들에게 표지판처럼 길만 알려주고 정작 스스로는 가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여 윤리적 역량과 종교적 권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는 교리보다 삶이, 계명보다 체험이,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알아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는 성경 말씀처럼 이제는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성직자의 지도에 순종하는 성실함도 좋지만, 개인이 내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와 자신의 양심에 맞게 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서로의 부족을 채워 주는 공동체적 신앙과 더 불어 개인의 역량과 카리스마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시대의 요청이고 징표라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 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잣대 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교회가 개인 체험과 삶을 중시하고, 개인의 카리스마를 위해 언제라도 지원을 아끼지 말아 야 한다면 교회는 결국 개인의 윤리적 판단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원주의 시대에 윤리적 가치의 상대화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윤리원칙들을 '상대화'하여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 걸이'가 되는 이기적 윤리관을 낳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결코 인본주의나 배타적 신앙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다수의 논리가 윤리기준이 될 수 없고, 다수의 세속적 관심과 대중의 요청이 윤리적 진리로 둔갑되어서 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윤리적인 삶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윤리적 삶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더 구체적으로 가톨릭 신자는 비록 내가 생각하는 윤리기준이 대중적인 기준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기준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만일 로마 교황청이나 지역 교회의 주교가 특정한 사회문제나 윤리적 판단에 관련해서 내게 어떤 요청을 한다면, 그것은 제도교회가 개인의 체험을 무시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구태의 연한 윤리 규범들을 권위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

  회의 교도권은 시대의 표징에 따라 개인의 신앙체험과 윤리적 판단이 과연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인지를 식별하고, 하느님 백성인 교회신앙의 공동유산과 공동체험의 지평에서 판단하고 해석할 유권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 신자가 교회의 윤리규범을 준수할 의 무가 있다는 말을 일종의 강요나 자유의 제한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윤리적 삶은 하느님 앞에서 책임쳐야 할 개인의 결 단과 판단에 달려 있다. 다만 교회는 최소한 그리스도 신자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 수 있는지 제시해 주고 있을 뿐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기 이전에 교회는 과연 교회의 가 르침 속에서 올바른 가톨릭 신앙을 구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그 것은 맹신이 될 수 있다. 내가 지키고 살아야 할 계명이 무엇 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 계명이 예수님과 사람 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 교회의 가르침과 윤리적 삶의 요청을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 가 있을 때 자기 성숙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아는 것, 내가 체험한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결코 진리의 잣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함께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