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4. 세상 속 사람들
하느님과 하나님은 서로 다른 분인가?
'하느님'과 '하나님'.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하느님의 이름 을 알고 있다. 그것도 같은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말이다. 아마 도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신의 이름을 두 가지로 부르는 그리스 도인들은 우리나라밖에는 없을 듯싶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신자 는 누군가가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담으면 거북하게 여긴다. 개신교인들도 '하느님'이란 단어는 아주 생소한 느낌이 라고 한 다.
왜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하나님이란 두 가지 이름이 생겼을 까? 두 분은 과연 같은 분이실까? 다른 분이실까? 같은 분이시 라면 우리는 왜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을까? 언젠가 개신교 목사님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내가 "우리나라 에서 참된 교회일치운동이 일어나려면 하느님 이름부터 하나로 통일해야 하지 않나요?" 하고 물은 적이 있다. 목사님들은 멋쩍 어하면서 '하느님'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을 뜻하는 신의 이름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으로 부른다고 했다. 유다 그리스도교 문명 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의 뿌리에서 보자면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고,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개신교인들의 믿음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 고유의 다신多神 신앙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오직 한 분뿐이신 절대자 '하나님'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섬기 는 참된 신이라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신앙의 하느님 외의 다른 모든 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개신교단들이 불교나 가톨릭에 대해서 배타적인 입장 을 취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의 비판적 견해에서는 불상과 부처를 섬기는 불교도들이 마치 신의 은총 없이 스스로 구원을 찾는 헛된 우상을 좇는 종교인처럼 보이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은 비록 같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섬기지만 수많은 성상과 인간의 순수한 믿음을 왜곡시킬 수 있는 이단적 요소를 지 닌 이들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하느님께 절대적 순종을 약속한 개신교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직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여타의 신앙적 요소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나무랄 수는 없겠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이민족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가혹하다할 만 처단하고 징벌하시는 분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은 절대적 순종이라는 신념 외에도 하느님의 무 한한 자비와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하느님 의 놀라울 정도로 크신 자비와 사랑, 인내와 희생을 예수 그리 스도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 준다. 하느님은 정의롭고 불의한 자 들을 심판하는 분이지만,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억눌리고 병든 이들을 돌보시며 모든 이의 모든 분이 되신다. 한 마디로 하 느님은 한 분의 절대적 주권자에서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인류를 돌보고 사랑하시는 착한 목자,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 하실 보편적인 주님으로 드러나신다.
모든 사람에게 비를 내리고 빛을 주시는 하늘天의 주主님을 섬기는 믿음(하느님)이 우리가 헛된 우상들에 마음을 뺏앗기고 우리를 빚어 주신 한 분이신 주님(하나님)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나한테 절대적인 믿음이라고 해서 누구한테나 절대 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폭력에 속한다. 아무리 절대적 진리라 해도 그 진리를 표현하고 이해하는 사회적 - 문화적 - 역사적 맥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참된 하느님 체험은 각자에게 주어진 개인적 은사에 속한다. 중요한 점은 자 신이 어떤 형태로 하느님을 체험했든, 그 이름이 담고 있는 풍 요로운 하느님의 속성 일부를 조금 맛보았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단 하나의 이름만 가진 분이 아니시다. 인간과 관계 를 맺는 하느님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묻는 우리 마음에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하느님은 위로자이 며 희망의 주님이시다. 내가 병들고 죽음을 체험할 때 하느님은 생명을 주관하는 전능하신 분이다. 죄와 악이 세상을 뒤덮을 때 하느님은 정의롭고 공정한 심판자이시기도 하다.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그분은 길잡이요 등불이 되시며, 용서와 사랑이 충만한 자비의 주님이 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갈망하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십계명의 제2계명에서 당신의 이름을 함부 로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 리의 일그러진 형상에 그분의 모습을 옮겨 놓고 우상처럼 섬기 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상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을 편협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일 때 생기는 오해와 편견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하나님은 같은 믿음의 대상을 부르는 두 가지 방식이다. 이런 하느님을 특정 종교와 신념에 얽매여 사람들을 갈라놓고, 마치 서로 다른 하느님인 것처럼 여기는 우리의 잘못된 믿음이 문제다. 같은 신앙인이라면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개신교인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의 하느님 체험은, 내가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삶의 맥 락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숨겨진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신자들을 배타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같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 안의 한 형제로 인정하고자 한다. 비록 가톨릭 신앙과 역사 안에서 갈라져 있는 형제들 이지만,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이 우리가 섬기는 하느님과 다르 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공유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배타적이고 편협한 신앙은 세상을 포요할 수 없다. 참된 믿음 은 세상에 살면서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함께 나눌 때 더욱 풍 요로워지는 신비를 깨닫는 데서 성장한다. 이름이 아니라 삶으 로 드러나는 신앙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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