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 성모 신심과 가톨릭 신앙 - 송용민 신부님

김레지나 2012. 4. 11. 22:58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3. 세상 속 교회
성모신심과 가톨릭 신앙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물론 신앙이 없는 사람들조차 가 톨릭교회는 예수님보다는 마리아를 더 숭배하는 것으로 오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상 앞에서 절을 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마리아 를 칭송하는 다양한 형태의 심신을 그리스도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행위로 치부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보다는 성모님의 아름다움이나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에 더 친근감을 갖는 면도 없지 않다. 한 세기를 고난과 역경으로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면, 성모님이 예수님 곁에서 겪으셨을 한 많은 인생에 더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지 싶다.

 

  가톨릭교회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데는 여러 가지 교리적인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이시자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용감하게 받아들인 신앙의 모범이시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인내와 통고의 삶을 봉헌하신 그분의 열정과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제자들과 함께 교회의 중심에 계셨다는 점은 성모 공경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런 교리적 이유가 곧바로 성 모님에 대한 신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의 신앙은 성모님 신심이 강한 어머니한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성모 신심을 지닌 것 같지는 않다. 대부분 신자들이 그렇듯이 묵주를 부적처럼 습관적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운전할 때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힘든 결정을 해야 할 때 성모님께 간청하는 정도다.

  열심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솔직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꼭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앙과 신심을 서로 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신앙이 특정 신심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제인 내가 성모 신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바 아니다. 때로 성모 신심이 사제생활의 중심이라기보다는, 사제의 독신생활 에서 오는 어려움을 정결하신 동정 성모의 도움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당위감일 때가 많았다.

  신학생 시절 동료 신학생들과 군사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 일이다. 위험한 낙하 훈련에 앞서 조교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애인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큰 소리로 "있습니다." 또는 "없습니다."를 외쳐야 했다. 그런데 신학생 하나가 큰 목소리 로 애인이 있다고 소리쳤다. "그럼 애인 이름 복창 3회 실시!" 하는 조교의 고함소리에 이 신학생은 큰 목소리로 "마리아, 마 리아, 마리아" 하고는 뛰어내렸다. 그 광경을 보던 동료들은 평소 성모 신심이 강한 그 친구를 보면서 '역시 성모님을 애인 으로 생각할 정도로 신심이 좋군! 하고 생각했지만, 훗날 그가 부른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가 아닌 진짜 애인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알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신심은 신자 각자의 개인적 성향이나 종교적 경험과 맞물려 있다. 성모 신심이 강한 사람은 대개 성모님의 발현 이나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거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친밀감 또는 심리적 애착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거나 심리적 친밀감을 갖지 못 한 사람한테는 성모 신심이 낯설 수도 있다. 아들 예수를 향한 성모님의 모성적 사랑에 대해 깊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부 개신교 교단들이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나 신 심에 인색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수적인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집중하려는 교리적인 이유 때문에 성모 공경과 신심 요소들을 늘 제외시켜 왔다. 실제로 그들의 신앙에는 성모님의 모성성 이나 신앙의 중개적 요소가 없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직접 통한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직접적인 하느님 용서에 대 한 감성적 체험이나 뜨거운 성령체험, 성경 말씀에 대한 충실로 이어질뿐, 성모님의 특별한 전구나 성인들의 통공과 같은 통교적 체험은 전혀 없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되지만(로마 10,17), 동시에 그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과 이루어지는 교감 또는 체험의 통교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섭리하시지만,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형태 로 오시지는 않는다.

  나의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에 서 시작되지만, 그 신뢰는 이미 나보다 앞서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사랑과 그분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성모님과 같은 분에 대한 인간적 공경 없이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성모님 없는 가톨릭 신앙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가톨릭을 '마리아교'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교회가 성모님을 높이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삶과 신앙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 가 는 데 큰 위로와 격려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모성적 사랑을 통해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 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주하게 지내느라 혹시라도 잊었던 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을 기억하며, 소식을 전하고, 가끔은 주름지고 볼품없는 어머 니의 손을 다시 잡아드리며 감사의 정을 표현한다면, 성모님 의 모성적 사랑과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이 훨씬 생생하지 않 을까 싶다. 5월 성모성월에는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사랑과 공경을 생생하게 체험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