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용민 신부님

☆★ 주일 미사 참례와 주일의 의무 - 송용민 신부님

김레지나 2012. 4. 5. 20:48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3. 세상 속 교회
주일미사 참례와 주일의 의무

  오래 전에, 좀 게으른 선배가 사제수품 후에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이제 미사에 절대 늦거나 빠지는 일 이 없을 거야. 내가 성당에 들어서야 미사가 시작되고, 혼자서도 미사를 할 수 있으니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늦 게 성당에 들어서는 신부를 쳐다보는 신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외면할 수 있는 용기와 벽을 보며 혼자 미사를 봉헌하는 무안함을 참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본업(?)이 미사인 신부와는 달리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하는 일은 때로 곤혹스러울 수 있다.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가끔 미사에 늦을 수 있고, 미사참례 자체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기 때 문이다.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거나 공교롭게도 주일에 집안 어른 제사나 생신 잔치 또는 꼭 참석해야 할 모임이 생길 수 있다. 어쩌다 본당 신부나 수녀, 신자들과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나면 성당 근처에 가는 것이 싫은 것도 사실이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적지 않은 신자들은 주일미사 참례 의무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아예 주말과 주일 내내 근무지를 벗어날 수 없는 신자들도 있다. 주 일의 쉼도 그들에게는 예외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늘 고해성사거리 1조 1항에 속한다. 오랜만에 미사참례를 해도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못 보는 경우도 많으니, 영성체를 못하는 그들이 냉담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니 주일미사에 빠지는 신자들의 마음은 오죽하랴?  

  솔직히 가톨릭 신자에게 주일미사 참례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대로 한 주간에 한 번 주일을 지키는 일은 교회에 속한 신자 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충실하게 그분께 머물고 있음을 드러내는 감사와 찬미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 워하세."(시편 118,24) 또한 주간 첫 날인 주일은 예수님의 부 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일미사 참례 의무를 강조하다보면 일상생활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풍요로운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상대적으로 빈약해지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미사참례만을 강조하다보면 미사의 은혜를 통해 살아야 할 일상의 기도 생활이나 모든 일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내 이웃의 고통과 시련을 외면하지 않고 돕고 살아야 할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잊어버리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몸만' 참여하는 것으로 주일의 신자 의무를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때로 사제보다 늦게 들어오고 먼저 퇴장하거나, 미사 시간 내내 공상과 분심 속에 주보를 뒤적이다가 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도 없이 성당을 빠져나가기도 한다. 성경책은 고사하고 가벼운 매일미사책이나 성가책 하나도 챙기지 않고, 주일에 들은 독서와 복음 내용을 기억도 못하면서 신자로서 주일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주일을 거룩히 보내고, 주님의 날을 경축하며, 주님 성찬의 삶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주일미사는 한 주간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는 자리이고,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심은 내 일상의 터전으로 나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영적 양식 을 얻는 일이다. 그래서 간혹 살다가 '불가피하게'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없 는 경우에 별 수 없다고 손을 놓거나, 다음 주에 고해성사를 보면 된다는 식의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주일을 비신자들처럼 일요일로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는 피치못할 특별한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에 그날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거나 주일의 의미에 맞는 희생과 기도로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도록 권장한다.(교회법 1248조)

  과연 주일미사 참례는 우리에게 부담스런 의무일까? 어떻게 주일을 감사와 축복으로 맞을 수 있을까?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영성생활이 소홀해진다는 고민을 털어놨을 때 영성지도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학업과 영성을 조화롭게 하는 일은 천칭이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과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극단은 늘 어려움을 낳기 마련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내 삶의 부수적인 선물 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힘들 때는 하느님을 간절히 찾지만, 내 일상이 편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달리 구하는 일이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가는 한 주간의 시간도 온전히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사참례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요즘 같은 경쟁시대에는 부수적인 일처럼 여긴다. 미사참례와 기도는 생활이 안정되어야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은 일상과 분리해서 별도의 시간으로 마련되어야 할 스케줄의 일부로 여기기 쉽다. 이쯤 되면 개신교가 강조하는 금전적인 십일조를 애써 무시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께 바칠 '시간의 십일 조'에 더 인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과연 나만의 것일까?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내 주변에서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 주간이 공짜로 하느님께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전환한다면 애초에 시간의 우선순위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한 주간을 보내고 주일에 하느님이 주신 시간의 일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려 드리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한 주간을 내 맘대로 쓰는 것도 모자라 주일까지도 거룩하게 보내는 데 인색하다면 과연 나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에 열심히 사는 신자들의 비결은 딱 한 가지다. 앉 으나 서나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감사와 찬미는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비록 내 삶이 남에게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사는 것은 은총이요, 감사요, 기쁨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갈라 2,20) 때문이다.

  주일미사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기 전에 나는 얼마나 내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는지 물을 일이다. 주일의 의무의 중심에는 미사참례가 있지만, 그것이 주일의 의무를 지키는 전부는 아니다. 자선과 희생, 기도 와 묵상, 그 어떤 형태로든 주일에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의 봉헌'이 우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