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본질을 사는 인간>중에서
19. 영적 힘의 재충전을 위한 비즉응성(1)
제자직의 첫 번째 본질,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결여된 채 계속해서 제자직의 두 번째 본질 곧 봉사활동에만 바쁘다면 우리 영적 상태는 머지않아 황폐한 뜰처럼 될 것이다. 모든 인간 삶이 다 그렇듯이 자기를 돌보지 않고 쉬지 않고 뛰어다닐 때 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육신의 피곤은 물론 내적 무질서ㆍ영적 공허감ㆍ좌절감ㆍ원망ㆍ상처ㆍ열정의 상실 등이다. 하느님께서는 가시덤불과 잡초가 우거진 황폐한 뜰은 거닐지 않으신다. 인간 존재의 근거이시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 영혼 안에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생명력을 느끼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어떤 단체에서 어떤 활동을 하든 큰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기쁨보다는 기가 빠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뛰었다는 기쁨은 온데 간데 없고, 외로움과 공허감에 휩싸여 안으로 숨고만 싶어진다.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뒤에 밀려오는 공허감을 감당하기 어려워 방황하기도 한다.
언젠가 나는 8일 동안의 영신수련 피정을 중간 쉼 없이 연속으로 두 번 지도하면서 심각한 영적 침체와 몸의 이상을 느낀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영신수련이 끝나고 두 번째 영신수련이 중간 정도 지났을 때쯤 뼈 마디마디가 녹는 것 같았고, 가슴이 뛰고 손까지 떨렸다. 당시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왠지 불안하고 슬프고 도망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단순히 피곤하다기보다 정체 불명의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다시는 영신수련 지도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진이 빠졌기 때문이다. 진이 빠졌다는 것은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는 영적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가리킨다.
진이 빠졌을 때는 반드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도록 해야 한다. 영적 차원에서 산후(産後) 조리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직 활동에 영적 산고의 고통이 따라옴을 역설한다.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갈라 4,19) 만일 사도직을 한 후에 영적 산후 조리를 소홀히 하고 계속해서 또 다른 사도직에 응답하고, 또다시 영적 산후 몸조리를 소홀히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영적 파탄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비즉응성은 영적 산후 몸조리를 하는 시간이다.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나는 피정이나 강연이 끝난 후에 가능한 한 빨리 회복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예를 들면 강연 후 있는 인사치레용 축하식에는 참석하지 않는다든가, 주일날 본당에서 활동한 경우에는 월요일 오전 동안은 전화도 받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홀로 내적 고독 속에 머물면서 운동도 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갖는다.
영적 힘이 고갈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편하지가 않다. 많은 이들이 활동 초기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일하면서 섬세한 모습, 매력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곤하고 짜증스런 모습으로 변해간다. 쉬지 않고 활동은 하지만 툭하면 화를 내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활동에 지쳐서 살아가는 자'처럼 되어버린다. 봉사활동이 끝나면 즉시 고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영적 파탄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거닐며 내면의 영적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이다. 훌륭한 제자가 되기 위한 비결은 "꿇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마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젖은 눈을 가질 수도 있고, 깨어진 마음을 온전케 할 수도 있다.
모든 교회의 봉사활동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개인적 기도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 기도 - 활동 - 기도 - 활동이란 고리가 지어져야 한다. 기도를 함으로써 봉사활동을 하면서 갖게 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모으고, 일에 치중하면서 갖게 된 인욕(人慾)이나 갈등의 요소들을 분별하고,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분별을 바탕으로 다시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아 세상에 나가 활동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과 함께 성찰ㆍ분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나의 활동이 끝나고 즉시 또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여 재충전하는 것이 비즉응성이다. 대나무가 줄기의 중간 중간을 끊어주는 마디가 있어 똑바로 자랄 수 있듯이, 우리도 이 비즉응성이 있어야 올곧게 자랄 수 있다. 영적으로 재충전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송봉모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0) | 2013.01.05 |
---|---|
악마는 우리를 서서히 타락시킬 뿐 (0) | 2013.01.05 |
관계 속의 인간 - 2. 결혼의 영성 (0) | 2012.10.07 |
관계 속의 인간 - 머리말, 남녀 창조의 근본원리와 그릇된 성차별 (0) | 2012.10.07 |
내 삶의 지팡이 (0) | 2012.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