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관계 속의 인간 - 2. 결혼의 영성

김레지나 2012. 10. 7. 16:02

송봉모 신부님의 책 p. 29

 

2. 결혼의 영성

 

  자연계에서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은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음은 양을 찾아, 양은 음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짝을 찾아 음양의 화합을 이루려는 생명체의 노력은 대단하고 치열하다. 그럼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식물들은 어떻게 짝을 찾아 나설까? 움직일 수 없는데. 식물들 나름대로 짝을 찾는 길을 고안해 냈으니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꽃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대신에 그들은 나비와 벌을 이용한다. 나비나 벌은 꽃가루를 먹기 위해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니면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꽃가루를 꽃의 암술머리에 흠뻑 묻혀준다. 용의주도한 어떤 식물들은 곤충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 식물은 두 종류의 꽃을 만드는데, 하나는 수정을 위한 꽃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맛이 좋아 곤충들에게 접대용으로 쓰인다. 아주 노골적인 유혹을 하는 것들도 있다. 난초과에 속하는 식물 한 종류는 아예 암컷 말벌과 비슷하게 생긴 모양의 꽃을 피운다. 눈, 더듬이, 날개 심지어 암컷이 발정했을 때 내는 냄새까지 피운다. 암컷 말벌인 줄 알고 교미를 위해 달려들었다 완전히 속은 수컷 말벌은 꽃가루만 흠뻑 묻히고 떠나간다. 짝을 찾으려는 노력은 이와 같다.

  친밀한 사랑을 주고받게 만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간의 성적(性的) 특성은 하느님의 모상(Image Dei)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창세 1,26-27). 그러니 남성과 여성이 서로 상대방의 성(性)에 매혹되는 것은 고상한 것이요, 자연스런 것이다.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하느님은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자, 하와의 손을 잡고 남자에게 데리고 온다. 그러자 남자는 여자를 향해 소리친다. "(이자는)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기쁨과 설레임에 가득 차서 여자가 자기의 짝임을 깨닫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이성에 눈이 뜨이면서 누가 자기 짝이라고 말해주지도 않는데 즉시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람이다." 하면서 자기 짝을 감지해 낸다. 이는 남녀 사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사(想似) 사이임을 가리킨다. 서로가 자기와 유사한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상사(想似)와 상사병(相思病)은 그 뿌리가 하느님께 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상사와 상사병을 허락하시는 걸까? 낙원에서 살던 아담은 고통도 없고 눈물 흘릴 일도 없었지만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심했으면 하느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을까? 아담이 외로웠던 것은 그에게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우자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상사의 상대가 없이는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자가 존재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대화가 생겨나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노랫소리가 들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세상 안에 들어오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성적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는 말과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0, 12, 18, 21, 25, 31)은 상반된다. 창조를 하시면서 내내 좋아하셨던 하느님이 아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는 보기에 좋지 않게 여겼다. 이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정말로 좋아 보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함께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완성되는 것이다.

 

  남녀의 상사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결혼도 당연히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이기에 사람은 나이가 차면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진리를 체험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에는 내재적인 완전함이 형성된다. 나의 배우자는 나의 부족함을 채워준다. 나의 무딤을 배우자의 섬세함이, 나의 연약함을 배우자의 강인함이 채워준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 자신이 아주 약하고 쉽게 부서지는 존재이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반려자가 필요하다.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서 돌보아 주고 의지할 반려자가 필요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며 나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반려자가 필요하다. 나의 반려자 이외에 누가 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 줄 것이며 누가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것인가?

  왜 예수께서는 첫 기적을 젊은 연인들이 가정을 이루는 혼인잔치에서 행하셨을까? 혼인잔치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반려자로 맞이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젊은 연인들이 행복한 부부로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축복해 주기 위하여 혼인잔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본질에서 창조되었으며 서로 돕는 짝으로 창조되었기에 상사적인 사랑을 갖는다. 그러니 둘이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리하여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자기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 구절은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세 가지 측면에서 알려준다. 그것은 떠남, 결합 그리고 한 몸이 됨이다. 트로비쉬(Walter Trobish)는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오는 세 가지 동사들(떠나다, 결합하다, 한 몸이 되다)을 결혼의 본질적인 요소로 보면서 각 동사를 분석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결혼에 대해 다루기 전에 여담으로 랍비 문학에 나오는 한 가지 얘기를 하겠다. 왜 결혼을 할 때 여자는 수동적이고 남자는 적극적인가? 왜 늘 남자가 여자를 찾아 나서고 청혼하는가? 그것은 잃어버린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 당연하듯이 갈비뼈를 잃어버린 것은 남자이니 남자가 찾아 나서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는 입으로 청혼하고, 여자는 가슴으로 청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입으로 청혼해도 부끄럽지 않은 날이 있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Valentine Day)이다. 이날만큼은 여자가 남자에게 청혼해도 괜찮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풍습을 보면,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고 남자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한 달 후인 3월 14일, 화이트 데이(White Day)에 사탕을 선물한다. 그렇다면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도 받지 못하고, 화이트 데이에 사탕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필자처럼 혼자 사는 이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러한 사람들은 화이트 데이 한 달 뒤인 4월 14일에 중국집에 모여 검은 옷을 입고 자장면을 먹으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이날은 화이트 데이와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블랙 데이(Black Day)라고 부른다.

 

 

떠나서

 

  떠나는 행위는 결혼이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법적 행위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결혼에 대한 이해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점은 결혼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쁜 결혼식이지만 떠나고 떠나보내는 이탈의 아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떠나보내는 부모로서는 자기 분신이 떨어져 나가기에 허전함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떠나는 자녀는 이제껏 돌보자 주던 부모를 떠나 홀로 서기를 해야 하기에 두려움과 불안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인간은 두 차례 부모를 떠난다. 막 태어나 탯줄이 잘릴 때 그리고 결혼으로 정신적 탯줄이 잘릴 때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산파는 탯줄을 자른다. 아기는 삶의 한 단계를 끝내고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갓 결혼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보살펴 주던 곳에서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를 보살피는 일차적인 자원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사실 자신의 뿌리이며 든든한 방패막이였던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부모의 늘 돌봄을 받으며 언제나 어리광 피우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 독립된 개체가 되어야 한다. 결혼으로 부모에 대한 의존관계가 끝나고 대신 부부간의 상호 협력과 의존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부모의 집을 떠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서는 결혼을 하면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했지 부모의 집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공간적으로 부모를 떠나 독립할 수도 있지만, 부모와 함께 살 수도 있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인 떠남을 가리킨다. 부모가 자녀에게 "저 놈이 언제나 철이 날까?" 할 때 "철난다."는 의미는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아니하고 자립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부모에게 의존하던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생을 자기가 책임지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 본문이 '부모'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떠나서"라고 세분해서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셔서 홀어머니만 남아 있는 경우에도 결혼이 성립되려면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으로 완전히 분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결혼의 첫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하고서도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는 남편이 아내를 어머니와 끊임없이 비교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친정 아버지와 비교하는 것과 같다. 또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둘이 그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부모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아기의 탯줄을 끊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 탯줄을 끊는 데는 30년도 더 걸린다. 다음은 정신과 의사 김정일의 말이다.

  이즈음 얼마나 마마보이와 마마걸이 많은지. 결혼 초에 부부의 갈등이 심해져서 이혼까지 가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는 마마걸과 마마보이가 만나서 애들 싸움을 벌이다 집안 싸움으로 확대되면서 그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 이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녀를 독립시킨 성숙한 부모라면 '너희들은 이미 어른이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버려두지만, 결혼시키고서도 자식을 치마폭에서 내놓을 줄 모르는 어버이는 뒤에서 부부 싸움을 조종하거나 아예 전면에 나서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결과는 누가 이기든 엄청난 상처이지만.

 

  신혼 부부들이 부모를 떠났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떠나지 못한 경우 중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고정된 부부 역할이다. 성장 과정에서 보고 배운 부모의 부부생활을 통하여 "남편은 이래야 되고, 아내는 이내야 된다."는 고정된 역할 분담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어머니는 그 결정에 따라가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여자는 결혼하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처럼 살게 된다. 매사를 남편이 알아서 결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편 아버지는 사업에만 관심을 쏟고, 어머니가 모든 집안일과 자녀 교육을 도맡아 하던 부모 밑에서 자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고 큰 긴장과 갈등이 일어난다. 아내는 남편이 책상 놓을 자리를 알려주지 않아서 화가 나고, 남편은 아내가 집안 일을 알아서 처리하지 못하고 일일이 결정해 주기를 바라니 화가 나는 것이다. 이렇게 고정된 부모 역할을 갖고 살아가는 부부들은 바람직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한다. "미리 정해진 역할을 갖고 살아가다 보니 로봇처럼 사는 것이다."

 

 

결합하여

 

  부모에게서 떠나야 진정한 부부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결합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동사 바카드는 '달라붙다'라는 의미이다. 마치 아교로 붙이듯이 이루어지는 결합. 영원히 지속되는 결합을 가리킨다. 이 동사는 본시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가리키는 이 동사가 부부간의 결합에도 쓰여진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이 중단 없이 이루어지듯이 배우자를 향한 결혼 서약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과 함께 하시고, 인간의 삶 가운데 임재하신다. 혼인성사를 통해서 결합된 부부는 하느님의 이러한 신적 사랑을 본받아서 배우자에게 같은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이렇게 신성한 서약으로 결합된 부부는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에 초대된 이들이다. 결혼 때 서로 손을 맞잡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난할 때나 풍요할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 장차 어느 운명에 처할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충실할 것을" 서약한다. 이 서약은 언제나 결합에 있을 것을 약속하는 신성한 서약이다. 삶에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상대를 받아들이고 돕겠다는 약속이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듯이 배우자를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폴 투르니에는 결혼서약을 일종의 선물로 간주한다. "결혼서약은 완전하고, 결정적이고, 무조건적이고, 개인적이며, 변할 수 없는 약속이다."

  부부간의 결합과 의존이 건강하고 바르게 이뤄지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결합한다고 해서 각자의 인격을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 안에 나의 주체가 용해되어 버리는 그런 식의 결합이 아니다. 부부사이의 결합은 반쪽끼리 합쳐진 것이 아니라 각각 전체로서 합쳐진 것이기에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것이 아니다. 부부가 결합해서 한 몸이 되었어도 죽을 때 부부가 동시에 죽지는 않을 것이며, 한편이 기분 나쁘고 화난다고 다른 편이 똑같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니다.

  부부는 짝으로서 일치하지만 그 일치 안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 만일 한 쪽이 다른 쪽에게 철저히 의존하거나, 다른 쪽을 자신에게 철저히 묶어둔다면 두 사람의 자유와 성숙은 파괴된다. 의존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상대에게 의존하고 또 상대를 자신에게 묶어둔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자동차가 발과 같은 미국에서 위험하다고 아내에게 운전을 못하게 하거나, 사고가 나면 어쩌나 두려워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이다. 아내가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시장에 가야 한다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어딘가 가야 한다 해도 남편이 없으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부부 의존관계는 궁극적으로는 서로간의 구속만 가져올 뿐이다.

  덩굴식물이 잘 자라는 식물을 휘어 감아 숨쉬지 못하게 하듯이 지나치게 의존적인 부부관계는 서로를 조여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간다. 부부의 결합은 나무와 같다. 나무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밀집되어 있으면 크게 자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 사이라도 무한한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더불어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타줄이 아름다운 화음을 내지만 각 줄은 따로따로인 것과 같이 부부도 마찬가지이다. 부부생활은 마주보기보다 한 곳을 함께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삶이다. 같은 종착지, 곧 생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함께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신전을 떠받드는 돌기둥처럼 서로를 항상 마주보고 있다."라고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는 또한 결혼한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또 함께 있으리라.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흩어뜨려 사라지게 할 때까지함께 서 있으리라.그대들은 늘 함께 있으리라.그러나 그대들의 공존에는 거리를 두라.천공(天空)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서로 사랑하라.그러나 그 사랑에 속박되지 말라.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가장자리에는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라.서고 가슴을 주라.그러나 상대의 그 가슴을 가지려고는 하지 말라.오로지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 가슴을 간직할 뿐.함께 소리를 내어도기타 줄이 외로이 각기 있듯이.

 

 

한 몸이 된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혼인의 마지막 조건이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의 성적(性的) 결합은 육체적 결합은 물론 정신적ㆍ영적으로 갈림이 없는 일치를 말한다. 육체적ㆍ성적인 일치는 두 사람의 심리적ㆍ영성적 일치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서로를 상대에게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한 몸 공동체를 형성한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관계적 사건을 가리킨다. 이 한 몸 사건은 예수께서 밀떡의 형체가 되어 우리 것이 되어버린 성체 사건처럼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그를 위해 자신을 넘겨주셨던 것처럼"(에페 5,25) 부부도 서로를 위해 자신을 넘겨주는 거룩한 투신을 하여야 한다. 한 몸 공동체는 부부가 어려 해 같이 살았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노력하면서 혼인성사의 신비를 갈아가려 애쓸 때 이루어진다. 긴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는 마치 오누이처럼 느껴진다. 그들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은 서로 닮은 데라고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외모까지 닮아 가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부부가 한 몸 공동체로서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가 외형까지도 닮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 세계도 닮았다는 얘기다. 부부의 얼굴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일치하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표지다.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 2장 24절을 중심으로 결혼의 세 가지 구성 요소를 살펴보았다. 결혼이란 성장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성사(聖事)이다. 그런데 이 셋의 관계는 무엇일까? 로비쉬는 이러한 관계는 삼발 의자와 같다고 말한다. 삼발 의자에서 한쪽 다리가 없다면 그 의자는 쓸모가 없다.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떠남과 결합 그리고 한 몸 됨이라는 세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완전한 결혼이 될 수 없다. 떠남과 결합 그리고 한 몸이 됨은 혼인성사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서 꼭 있어야 되는 기본 요소들이다.

  트로비쉬는 결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안에 자녀가 포함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자녀는 결혼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자녀는 가정의 완전꼴을 형성해 주지만 필수물은 아니다. 자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것이지 혼인의 필수조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소박을 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행위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본질 요소에서 자녀가 빠졌다는 것은 또 다른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부부관계가 자녀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더 밀접한 관계란 것이다. 사람은 부모보다 배우자를 더 그리워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부관계는 무촌이고, 자녀와의 관계는 1촌이다. 무촌이란 것은 촌수가 없는, 더 가까울 수 없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한 몸임을 의미한다. 부부간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아가 8,6) 내 배우자가 내 자녀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먼 여행길에서 돌아오면 배우자보다는 자녀들을 먼저 안아주고 반가워한다. 하지만 먼저 배우자에게 돌아온 기쁨과 친밀한 사랑을 표현하여야 한다. 부부관계는 자녀와의 관계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일치(Marriage Encounter)를 위해서 오랫동안 힘쓴 갤라거 신부는, 부부가 핵이라면 자녀는 그 핵 주위를 도는 위성과 같다고 한다. "자녀는 부부간의 사랑이 만들어 낸 열매이지 핵은 아니다."라고 하며 많은 부부가 결혼을, 부모가 되는 예비 단계로 여기고 있음을 경고한다. 많은 부부가 결혼을 어머니, 아버지가 되기 위한 전 단계라고 여기고 자녀가 태어나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자녀에게 바치고 부부관계는 옆으로 제쳐놓는다. 하지만 부부가 자녀에게 첫째로 줄 것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자녀들 편에서도 부모 서로간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지, 부모끼리 서로 소원(疎遠)하다면 자녀들은 제대로 사랑 받는 것이 아니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하느님은 인간을 성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의 성을 구분하고 그들이 성교라는 사랑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창조하였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성적 결합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최초의 부부는 벌거벗은 채로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는 부부가 성에 대해 생각할 때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결혼한 사람은 그들이 누리는 삶의 형태를 생각할 때 얼굴이 붉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부부는 출산을 위해서만 성교를 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만일 출산이 목적이 아니고 쾌락을 목적으로 성교를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창세기는 부부 사이의 성적 결함의 목적을 출산은 물론 부부가 한몸이 된다는 점에도 두고 있다.

 

  벌거벗음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감성적. 심리적. 영적으로 서로 사이에 가릴 것이 없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벌거벗는다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든 성서 전통에서든 한 사람의 약점, 한계성을 모두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러니 상호 신뢰와 받아들여짐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한 벌거벗을 수 없다. “벌거벗고 만납시다.”할 때 ‘벌거벗음‘은 꾸밈이 없는 모습으로 만나자는 얘기다. 인간이 벌거벗지 못하고 옷을 걸치는 것은 벌거벗었을 때 약점들이 다 노출되어 공격자들에게 쉽게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으면서 서로의 약점과 한계성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고, 깊은 이해와 사랑 속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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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신부님의 책 p.130

 

4. 자기 완성을 위한 결혼 생활

 

하느님 앞에서 일치된 부부관계

(전략)

  하느님과 일치가 없으면 부부 사이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던 순간 아담과 하와가 보여준 모습은 언뜻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애처럼 보인다. 하와가 과실을 한 입 베어 물고 남편에게 건네주자 아담은 행복한 표정으로 받아먹는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그런 모습은 하느님과 일치를 떠나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거짓된 일치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곧 서로를 비난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게 되는 것이다.

한몸 공동체로서 부부가 늘 일치하려면 부부가 함께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부부가 늘 일치할 수 있는 첩경이다. 부부의 기도는, 두 사람을 만나도록 운명지으셨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으로 머무시는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행위다. 하느님께 부부가 함께 의탁할 때 어찌 부부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부부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인간적 차원의 사랑을 넘어 존재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한다. 곧 하느님으로붜 나오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asgkr가로 널리 알려진 C.S 루이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능하려면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귀한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지금보다 더 잘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감해지거나, 하느님 대신에 가장 귀한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에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것이 첫 번째 위치에 놓여졌을 때에 두 번째 것은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것이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