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2년

=======오병이어의 기적 - 송봉모, 차동엽, 양승국 신부님 묵상

김레지나 2012. 4. 21. 09:39

 

어제 복음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미사 중에 문득,

'나 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희생과 나 한 사람의 기도가

여기 모인 많은 신자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영적인 빵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내 기도와 희생은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를 통해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기적을 행하시겠구나.

그래서 올바른 신심으로 드리는 미사의 가치가 그렇게도 큰 것이겠구나.' 하는 묵상을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해석이 분분합니다.

성경말씀은 얼마나 풍성한 뜻을 담고 있는지, 이런 저런 해석들이 모두 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안타까운 일은 한 가지 해석을 하는 사람이 다른 한 가지 해석을 틀렸다고 배척하는 경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묵상하는 사람들 중에서

글자 그대로의, 물고기와 빵의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성적인 해석'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그런 식으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 가능한 사건에 대한 해석을 기적이라는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해석을 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믿음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극히 일부 신자들에게서,

그런 식의 태도로 말미암아 성경에 흐르는 중요한 신비를 놓치고

성령 운동을 배척하고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도

제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느라 지어낸 이야기이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50퍼센트 신이셨고, 50퍼센트 인간이셨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100퍼센트 신이셨고, 100퍼센트 인간이셨습니다.

 

어제 어느 홈피에서 나누어진 대화를 붙입니다.

 

 

==========================================

 

오병이어의 기적은 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눔의 기적, 사랑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힘을 강조하시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구요.

어떤 분들은 어린 아이의 순수한 마음, 사랑의 마음, 작은 봉헌이 큰 기적을 이룰 수 있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송봉모 신부님과 양승국 신부님의 묵상도 나누고 싶어 아래 붙입니다. 

 

 

===================

이하 송봉모 신부님 묵상글입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19세기 성서학자인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 증식 기적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보다는 영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라 보았습니다. 초대교회가 신자들에게 사랑의 기적을 알려 주기 위해서 창작한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음식을 갖고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음식을 갖고 온 이들은 기회가 오면 무리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 먹으려는 심산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한 소년이 자기의 도시락으로 갖고 온 보리빵 다섯 개와 조그만 생선 두 마리를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무리들 앞에 들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음식은 모두 이것뿐이니 이것을 가지고 나누어 먹읍시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 군중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움직였고, 자기가 갖고 온 음식을 풀어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어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이가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금세기 놀란(Albert Nolan) 같은 학자는 슈트라우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빵 다섯 개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기적에서 정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기적이던 무리가 이타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사랑과 연대감을 갖게 된 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가능한 한 이성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빵 다섯 개를 갖고서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됩니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 되기에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적 사건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학자들의 가설은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의 반응 앞에서 설득력을 잃어버립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 능력을 목격하고는 예수께 달려들어 강제로라도 왕으로 삼으려했습니다(요한 6,15 참조). 만일 이들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실제적인 빵 증식의 기적이 없었다면, 곧 군중이 자기들이 갖고 온 음식을 서로 나눠먹는 사랑의 기적만 있었다면,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고 달려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빵 다섯 개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기적은 창작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던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이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성을 중시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성서를 공부한다면 성서는 단 두 가지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의 앞과 뒤 곧 표지만 남을 것입니다.

                                           - 송봉모 신부님 -  

================================

 

......................................................................................................................................................................

 이하 차동엽 신부님 묵상입니다.

 

 오병이어에 대한 설명은 (즉 어린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사람들이 각자 꿍쳐놨던 것을 꺼내어 나눴던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나누고 하다 보니까 결국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그럴듯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럼 그것을 가지고 왜 기적이라고 한 걸까?"

 

필자는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여기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정상적인 유다인들이 아니었다.

주로 '오클로스'(ochlos) 라고 일컬어지던 이 사람들은 '부랑자'라는 뜻에 가깝다.

자신들의 먹을 것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위의 이성주의적 해석은 우리를 온전히 설득하지 못한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이것은 진짜 기적이다" 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 때 그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  (마르 6,33-44 참조)

 

만일 군중들이 가지고 있는 보따리에 음식이 들어있었다면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실 분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저

"자, 저녁시간이니 보따리에 있는 것을 꺼내어 나누어 먹자" 고 말씀하시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품으셨다.

그들에게는 먹을 빵이 실제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라는 물음이 남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어떻게'는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어떻게'의 문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한 번 생각해 보라.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1%밖에 안 된다.

이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이성과 오관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는 전체 진리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나머지 99%의 진리는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99%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다.  

우리 주변에서 '갑자기', '이유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들이 사실은

이 99%세계에 해당하는 현상들이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이 99%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기적은 기적이다.

                                                                ........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코린 2,9)

 

==============================================================

 

 

 

이하 양승국 신부님 묵상입니다.

 

 

5월 6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요한 6,1-5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흐뭇해하시는 하느님>

 

 

    형제들과 텃밭 만들기 작업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학교 다녀오던 ‘초딩’ 막내가 한참을 옆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가 자기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별 도움은 안 되었습니다. 자기 키만한 삽을 들고 왔다갔다, 들기에 아직 힘에 부치는 쇠스랑을 들고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결과는 ‘방해’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능력이 없지만, 비록 별 도움이 안 되지만 자기도 돕겠다고 나선 아이의 마음에 다들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런 막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느님 앞에 선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선행을 실천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난다긴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을 위해 많은 공로를 쌓았다 할지라도, 사실 하느님 앞에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작은 우리의 몸짓, 작은 것이나마 봉헌하려는 진실한 마음, 당신을 향한 정성, 그것에 행복해하시고 대견하게 여기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전지전능하신 분, 그분 앞에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도움 없이도 모든 것을 가능하십니다. 당신 손수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인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시고, 그 인간들이 잘되기만을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순간이 언제겠는가 생각해봅니다. 당신 손수 창조하신 그 인간들이 하느님 당신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닐 때가 아닐까요? 자신을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은혜 앞에 기뻐하고 행복해할 때가 아닐까요? 함께 이 세상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행자들과 잘 어울리며 평화롭게 길을 걸어갈 때가 아닐까요?

 

    최근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사화를 두고,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축소시키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 우리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 그로 인한 빵의 기적보다는 한 소년의 나눔이, 주변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십시일반 거두어보니 모두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는 식의.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그에 앞서 우리의 하느님은 인간의 도움 없이도 모든 것이 가능한 창조주 하느님, 기적의 하느님,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조를 대견해 하십니다.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 하느님 당신을 생각하는 그 작은 마음과 정성을 기뻐하십니다. 정말 보잘 것 없지만 당신을 향한 작은 봉헌을 갸륵해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12.04.20. 20:57 new
제멋대로의 해석에 함몰되어 정작 중요한 걸 놓칠뻔 했네요. 레지나님 감사합니다. ^^
 
2.04.20. 21:56 new
 이리 답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병이어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성경 전체를 대하는 태도에서 중요한 것 같아서
두 분 신부님의 묵상글을 올렸는데..
00님 묵상과 차이가 나서 00님이 어찌 받아들이실지 살짝 걱정이 되었었답니다.
괜한 노파심에 덧붙이는 제 말을 두 번이나 고쳤네요.^^

얼마 전에 정진석 추기경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눔의 기적이라 말씀하셨어요.(그랬다가 극히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유감표명을 했었지요. 기적이 아니라고 하신 게아닌데 

.......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불을 놓으시어
나눔이 이루어지게 사랑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시고,
그런 나눔도 기적 중의 기적이지요.

고맙습니다. 

 

  12.04.20. 22:01 new
제가 정말 감사할 일인데...^^ 이렇게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 모르는 걸 깨우쳐 가는거죠. 제가 많이 모자라요. 언젠가 어느 신부님이 청년들 보고 그러셨던가.. 유아세례 받은 사람들의 특징... "성경과 교리 상식에 있어서 좀,, 무식하다" ( - 모두가 그러는 건 절대 아니예요! ) 그 전형이 바로 '저' 이거든요. 요새 부쩍 드는 생각... 청년 예비자 교리서라도 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12.04.20. 22:20 new
맞아요.. 저처럼 유아세례 받은 사람들이 그러기가 쉬워요.ㅎㅎㅎ

토마스는 의심을 통해 확신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었는데,
유아세례 받은 사람들은 확신하기 위한 의심의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당연히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 계시려니'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예비자 교리부터 들어야겠다 싶어서 몇 번 참석해봤는데, 나중에는 좀 눈치가 보여서 그만 두었네요..ㅎㅎ
지가유.. 성경을 한 번도 통독한 적이 없는 완존 엉터리 신자랍니다
예비자 교리서, 성경 꼭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습니다.
레지나의 올해 목표입니다.

00님도 레지나도 홧팅!!
 
  
06:19 new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을 볼것이 아니라 달을 봐야하지요...
빵이아니라 나누려는 마음을 보아야겠지요...
그리고
나눔의 기적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오래동안 눈을 마추고 있읍니다.
빵만이 아니라...
기쁨도.. 아픔도..슬픔도.. 같이 나눌수있는 진정한 크리스챤이 무었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책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았읍니다.
 
 =========================================

 이하 2012년 7월 29일에 덧붙입니다.

 

<먹고도 남을 것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는 청하는 것과 감사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제 손에 든 빵을 많이 불려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빵이 불어나기도 전에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경주의 최 부잣집 사연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최 부잣집 가문의 마지막 부자는 가진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어느 노스님에게서 들은 다음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똥오줌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재물은 쌓아 두면 독이 되지만 나누면 덕이 됩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저의 하느님, 당신께 모든 것을 돌려 드립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돌려 드릴 것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 나누며 사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new
오늘 복음이었습니다.

 '자칭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는' 울 윤성민 신부님께서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는 부분에 대해 강론해주셨어요. 

(볼수록 빠져든다는 건 레지나도 인정ㅎㅎ) 

신부님께서 참 재미있고 쉽게 강론해주셨는데, 제가 그대로 옮겨서 훌륭한 강론을 옮기지는 못하고,

 엉터리이겠지만 제 나름으로 받아들여 새로 정리해서 써봅니다.

(둘째 아들 녀석이 미사 중 자세가 으찌나 엉망이던지, 강론 듣다가 아들 뒤통수 째려보느라고~ 집중해서 듣지 못했네용.^^)

 


예수님께서는 분명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지요.

분명, 우리가', '어디서' 라고 말씀하셨는데, 필립보가 엉뚱하게도 돈계산해서 세속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거지요.
'우리가' - 예수님과 함께
'어디서' - 하느님에게서
이런 대답을 원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많은 표징을 보고 예수님과 지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지 못한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구하면~ 우리의 보잘것 없는 능력이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만큼 발휘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도 어려움도 다른 데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맡기고 답을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면 옛 기억이 돌아오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보면,, 엘리사가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지냈던 제자들도 구약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하는 엘리사의 말씀을 기억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