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다. - 하느님의 경륜

김레지나 2012. 4. 20. 21:43

차동엽 신부님의 신나는 복음묵상 나해 부활 제 4주일 - 2012년 4월 29일

 

복음묵상 소책자 p. 45   - 마음으로 읽기

 

2) 밴댕이 속알딱지만큼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 10,14-15).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목자, 이 목숨 바쳐 사랑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는 참 몰라줄 때가 많습니다. 철이 덜 든 아이마냥 '아버지 사랑은 당연한 것'이라며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우리들 ...... 오늘 이 시간, 그분 사랑 속에 깊이 잠겨 봄이 어떨까요? 몇 해 전, 제가 평화방송 TV강의로, 책으로 풀어드린 <향주삼덕> 중에 한 대목을 들려드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만 알고 그분의 사랑을 잘 모른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사랑을 동시에 담고 있는 낱말이 바로 '경륜'이다.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경륜은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으로 나누어 언급된다.

  (중략) '창조경륜'은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의 경륜이고, '구원경륜'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이휴부터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느님의 창조 역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따라서 창조경륜과 구원경륜은 현재도 같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경륜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녹아 있다.

 

  먼저 창조경륜을 보자.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랑이 충만할 때다. 사랑이 차고 차서 넘치면 창조를 하게 되어 있다.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혹은 자녀에게 자꾸 이것저것 만들어주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이처럼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꾸 만들고 주고 싶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삼라만상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면서 모험을 하셨다.

  "자유를 줄까? 말까? 를 고민하다가 "주자!"하고 모험을 하셨다

  이 '자유'는 사랑의 절정이다.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일까?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서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피조물이 아니라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앞에서 자꾸 주눅 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당신 앞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사랑의 하느님께서 속삭이신다.

  "고개를 들어라. 내 눈을 바라보아라. 나는 네 눈을 쳐다보고 싶지 네 머리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너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서 너를 만들었단다."

  혹여 우리가 당신을 배반할 수 있음에도, 하느님은 사랑을 위해 모험을 택하셨다. 사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흉내 내기 쉽지 않다. 우리는 사랑할수록 더 많이 소유하려 하고, 억압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들으 함정이고 유혹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경륜은 인간을 당신 사랑의 파트너로 삼으시기 위하여 배반의 가능성을 무릅쓰시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이 대목이 바로 하느님 창조경륜의 절정이요 백미다.

 

  이제 구원경륜은 또 어떠한가. 하느님은 사랑의 구원경륜으로 강생구속이라는 기막힌 방법을 택하셨다. "내가 사랑하는 저들이 이토록 나를 만지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느끼고 싶어하는데 그렇담 내가 그들 눈높이게 맟춰져 보자." 하시어 당신께서 사람이 되시어 오신 것, 곧 강생하신 것이다.

  사랑은 이처럼 눈높이를 맞춘다. 하느님은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시어 육신을 취하셨다. 이 강생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면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까지 끊임없이 인간이 되시어 낮은 자리로 강생하셨다.

  계속 내려왜인가? 진정한 사랑은 같이 아파하고 같이 느끼며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절망 쪽으로 오셨다.

  입장을 바꾸지 않고 위에서 그냥 뚝! 뚝 떨어지는 사랑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반면 그 사람과 같은 눈높이로 가서 함께 할 때 상대가 감동 받는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이 하느님 사랑은 결국 죄인도 품는 사랑이다. 나는 이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기 좋아한다.

  "하느님 사랑은 '저인망 사랑'이다!"

  이는 무슨 말인가? 하느님 사랑은 저인망 그물처럼 밑바닥을 훑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 저인망에는 안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 죄인들까지도 다 훓으시어 당신 사랑 속에 잠기게 하신다. (....) (차동엽, <향주삼독 - 믿음 희망 사랑> 참조)

 

  결론은 이것입니다.

  "나 하나가 주님께 전부다."

  그러니 조금씩만 더 주님 사랑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우리가 되어 봄이 어떨까요? 그리하면 주님께서도 "너 이제야 철 좀 들었구나!"하시며 기특해하실 테니 말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저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눈곱만큼이라도 안다면, 저희 눈에서는 벌써 봇물이 터졌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저희를 위한 주님의 속앓이를 코딱지만큼이라도 안다면, 저희느느 진즉 헛군데에서 위로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멈췄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의 이해력이 밴댕이 속알딱지 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저희 입에는 연신 감사와 찬미뿐이었을 것입니다. 아멘!